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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의사가 있는 병원 탐방]
인권과 치유가 만나는 녹색병원 신경과

  글_송현석(대한신경과학회 회원소통위원회 위원, 녹색병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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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경과 병원 탐방은 서울시 중랑구에 있는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서울 녹색병원(이하 녹색병원)이다. 녹색병원은 2003년 9월 20일 개원하였지만, 한국 현대사의 도도한 물결 속에 녹색병원은 이미 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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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병원 출입현관 바닥에 설치된 기념 동판들로 원진레이온직업병 투쟁과 YH무역 사건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1.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의 설립과 병원 건립 운동


원진레이온은 경기도 미금시(남양주시)에 소재했던 비스코스 레이온(인조견) 섬유 생산 공장으로 1962년 한일회담 당시 한일 청구권 자금에 기반하여 일본 도레이(동양레이온) 회사의 중고 레이온 사 제조 기계를 36억 엔이라는 비싼 가격에 도입하여 설립되었다. 당시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일본이 지불하는 '배상금'을 일본정부가 현금으로 한국에 지불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직업병을 양산한 고물 설비를 한국의 친일파(화신그룹의 박흥식)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그 당시 이미 일본에서는 레이온 사 공장에서 심각한 직업병 사례가 나타나 사회 문제로 대두되어 공장들이 문을 닫으려는 걸 오히려 한국에 중고 기계를 고가에 팔게 된 것이다. 1966년 흥한화섬으로 시작하여 회사는 경영난으로 법정관리(1968)와 세진레이온(1972), 원진레이온(1976)으로 이름이 바뀌며 박정희 대통령의 일가와 퇴역 군 장성들이 사장이나 중요 보직으로 내려오고 산업은행이 법정관리하며 한때, 3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종사한 준 국영기업이었다.
레이온 제조 공정에는 용매제로 이황화탄소(CS2)가 사용된다. 이황화탄소 가스 흡입이 장기간 지속되면 만성이황화탄소 중독증 환자가 된다. 그 증상으로는 뇌혈관의 이상으로 뇌경색, 치매와 정신병, 파킨슨증상과 말초신경질환 등이 있다. 또한 망막의 미세혈관류나 출혈 등을 보이는 이황화탄소성망막증이 특징이다.
1981년 원진레이온 노동자가 전신마비 증상으로 국립의료원에서 아황산(SO2) 가스 중독증으로 첫 번째 직업병 판정을 받았다(나중에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판명). 87년 이후 이황화탄소 중독 판정자들이 속속 나타나고 현재까지 950명의 이황화탄소 중독증 환자가 확인되었다. 1988년 15세 문송면 군이 온도계 회사에서 일하다 한 달 만에 급성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사건이 9시 TV 뉴스에 보도되고 원진레이온 산재 피해자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여 의료계(사당의원, 구로의원)의 진상 조사와 국회의 중재로 정부와의 십여 년의 투쟁과 협상을 통해 피해자들의 직업병 인정과 원진 직업병 전문병원의 설립기금을 마련하였다. 먼저 1999년 구리에 원진녹색병원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그리고 복지관을 열고 노동자들과 소외된 계층을 위한 종합병원을 건립하기로 계획하였다.


2. YH 무역과 서울기독병원 건물에 자리 잡음


서울 녹색병원 건물은 50여 년 전 미국에 수출하는 YH 무역의 가발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1979년 8월 직장폐쇄로 노조를 무력화시키려는 사측에 맞서 신민당사 점거에 들어간 YH 무역 노조 여성 노동자들이 경찰의 진압에 해산될 때 노조원 김경숙 씨(22세)가 사망하고, 이후 신민당 김영삼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제명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YH 사건이다. 이 여파로 부마항쟁 및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 유신정권이 끝난다. 이후 공장 건물은 서울기독병원으로 탈바꿈하여 면목동에서 500 병상 이상의 종합병원으로 성업하다가 IMF 이후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건물이 경매에 나와 수차례 유찰 끝에 원진재단에서 낙찰받아 대대적인 리 모델링 공사 후에 개원하여 현재 중랑구에서 약 300병상의 종합병원으로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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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병원 전경


3. 민간형 공익병원으로 자리매김


서울녹색병원은 민간 재단에 의해 운영되는 민간병원이지만 공공성을 추구한다. 지역건강센터에는 세 명의 사회복지사들이 각자 지역의 관공서나 NGO와 협력하여 소외된 이웃에게 문턱 없는 병원이 되도록 노력하여 비정규직 단체, 난민, 외국인 노동자, 미등록 이주아동 등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연계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봄 바자회, 지역의 복지관 등에서 무료 건강강좌를 열고 있다. 건강 방파제 사업 또한 이런 일환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녹색병원은 직원들이 매달 기부를 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또한 녹색병원의 활동에 동의하고 감명을 받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녹색병원 발전 위원회에 기부 후원하고 있다. 또한 세월호 사건 유족들, 산재사망자 가족들, 단식농성자들을 위해 농성장에 방문하여 건강관리를 하고 단식을 중단하는 의학적 권고를 내리고 단식 후 회복에 도움이 되게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구축하였다. 고공 농성자를 위해 사다리를 오르길 주저하지 않는 의료진들이 있다.


4. 서울 녹색병원 신경과는 2006년 처음 개설됨


역대 네 분의 과장님들이 혼자 또는 두 명이 함께 근무하였고 필자가 2017년 1월부터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신경과 전문의로서 다양한 신경과 질환의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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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건강센터 사회복지사들과 함께 (왼쪽부터 송제형, 양주희, 필자(송현석 부원장), 정애향)


전공의, 공보의, 전임의, 대학교수, 요양병원 봉직의를 거치면서 배운 것들이 녹색병원에서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면목동이 서울 시 중에서 가난한 구에 속하여 아픔을 참다 결국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치료비가 없다며 자의 퇴원을 원할 때 지역건강센터(사회사업팀)에 의뢰서를 써서 어떻게든 치료비를 마련해서 치료해 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 첫 의뢰 환자는 뇌졸중으로 와서 치료 잘 받고 퇴원하여 지방으로 일을 다니면서도 꼬박꼬박 외래에 찾아와서 약을 타 복용하면서 재발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또한 부임 초부터 인권클리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단식 농성장에 찾아가 노동자들을 진료하며 보람을 느꼈다. 나중에 노사협상이 타결되어 고맙다고 기념으로 수건을 보내왔는데 진료실에 간직하고 있다. 난민들을 위한 집회에 의료지원을 나가기도 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마석 가구 단지에 매달 정해진 토요일에 무료 진료 봉사를 나가는 것도 보람된 기억이다. 또 지역건강센터에서 진료비 지원을 요청받아 내게 온 대리운전 기사분에게 중증근무력증 진단을 하고 좀 더 나은 진료를 권해 상급병원에 의뢰했는데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고 가끔 와서 진료 받고 간다. 인권클리닉이 2017년 9월 인권치유센터로 확대하여 개소식을 하면서 인권을 위해 애쓰시는 다른 과의 선생님들과 교류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동료 의사들이 모두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병원의 공익적 활동에 대해 이해하고 있고 도움을 요청하면 잘 도와주시는 것도 참 고맙다. 일본에는 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이라는 진보적 의료기관들의 연합체가 60년이 넘는 전통을 갖고 있는데 그 회원 병원들과 교류가 코로나19로 잠시 멈추었지만 언젠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그들과 함께 술 한잔 기울이며 인권을 위한 의료에 대해 대화하는 걸 희망한다. 아쉬운 점은 처음엔 인권의학연구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회적의료기관연합회(사의련, 일본의 민의련 같은 단체), 중랑넷(중랑구 내 시민단체 모임) 같은 단체에서 열리는 인권교육이나 커뮤니티 케어 강의나 토론을 들을 시간이 있었는데 점점 업무가 많아져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달 해 오던 헌혈도 이제 병원에서 1년에 네 번 하는 헌혈 행사 때만 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3월 신경2과가 개설되어 함께 일 하게 되어 좋았는데 9월에 사직하셔서 다시 홀로 되었는데 직장에서 일 말고 다른 보람을 찾는 신경과 전문의 선생님은 녹색병원에 적극 지원해 주시길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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