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류상효(류상효신경과의원 원장)
신경과 의사가 되기까지
의과 대학 시절을 회상하면서, 떠오르는 단어를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대답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재시험”이다.
방학을 맞이한 춘천이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함 마저 감도는, 강원도의 한 도시, 봉의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한 대학 캠퍼스 안의 도서관이 보인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방학 기간이면, 춘천이 아닌 서울이나 경기도, 혹은 전국 구석구석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해외여행을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여러 가지 자신만의 이유들로, 방학 기간 동안을 학교 기숙사나 춘천의 한 자취방에서 보낸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고 가운데 움푹 꺼진, 분지 형태의 작은 도시 춘천이다. 이곳의 겨울방학은 가히 지구 온난화가 무색할 정도로, 매우 사납다. 여름방학은 어떤가? 극 과 극을 달리는 한반도 내륙 가운데 자리 잡은, 이 작은 도시의 여름은 심해열수구(Hydrothermal Vent)옆에 기적적으로 살아있는 관벌레(Tube Worm)처럼 인간들은 생존을 이어간다.
낭만이 가득하며, 여유로움의 극치를 만끽해야 하는 대학 생활의 꽃 중에 꽃인 방학기간의 한 중심 서있다.
겨울 방학은 시베리아의 추위가 무색한 가운데, 해부학 실의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카다바를 동반 삼아 홀로 의학관을 서성이는 자유로운 영혼을 생각나게 하고, 화산활동의 용광로같이 찌는 듯한 여름 방학은 나에게 있어서 오아시스를 꿈꾸게 한다. 그리고 신기루에 길을 잃고, 시공간 능력을 상실한 체 의학관과 도서관 주변만 배회한다.
몇 해 전 전 세계를 강타한 넷플릭스의 한류 시리즈 가운데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의 한 장면이 그려진다. 썰렁하고 스산한 학교에 몇몇 안 되는 등장 인물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의학관 강의실 및 학교 도서관을 어슬렁거린다. 등장인물들은 다들 구면이다. 재시험에 단골인 동기, 선배 그리고 후배들이다. 물론 간혹, 성적이 상위권으로 생각되던, 인물들이 카메오로 출연하여, 재시험을 함께 준비하기도 한다. 나에게 이런 재시험 준비는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졸업 때 까지 함께 한 재시험…
그 사연은 내가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전, 그때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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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대학 입시제도는 지금의 것과 많이 다르다. “선(先) 지원, 후(後) 시험”의 학력 고사 라는 것이다. 이 제도는 우선 수험생들이 다니고 싶은 학교와 학과를 먼저 선택하고 그곳에 가서, 시험을 보고 그곳에 지원한 학생들끼리만 경쟁을 하여 합격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이다.
1992년 겨울 어느 날 한림대학교 의과대학에 시험 접수를 하러 간 적이 있다. 이번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6번째의 대학 도전이었다. 다시 말하면, 5번이나 대학 입시에서 낙방했다는 말인데… 그도 그럴 것이 일반 고등학교 6등급의 내신 성적과 공부 한번 잘해본 적이 없는 인생이 보편적인 나였기에 어찌보면, 의과대학 입시는 당연한 아니, 무모한 도전 임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학창 시절 아무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어떤 제자가 5번의 대학 입시를 실패하서는 갑자기 나타나 이번에는 의과대학을 가겠다며 고등학교 입시 담당 선생님의 서명을(그 당시에는, 대학 입시 접수를 위해서 필요한 절차였다) 받으러 왔다.
‘네가 의과대학을? 하…...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라고 말씀하신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자신의 아들을 의사로 만들겠다며, 주변의 온갖 비난을 들으시면서 파출부로 생계를 책임지시던, 어머니의 눈물이 눈에 떠오른다.
학력고사 시험 접수증을 들고, 서울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의 한 구석에 의과대학 접수 창구로 갔다. 30대 전후로 보이는 듯한 아가씨가 접수증을 받고 있다. 나는 나의 고등학교 내신 성적이 적힌 대학 입시 접수증을 그 아가씨에게 건넸다. 그 아가씨는 “어머나 6등급이네요. 오늘 의과대학을 접수하시네요.”라고 말한다. 마치 내 귓가에는 ‘의과대학은 아무나 가나?’ 라고 들린다.
이렇게 나는 지방의 한 전문 대학도 들어가기 어렵다던 고등학교 성적표를 가지고, 6번째의 시험 끝에 의과대학생이 되었다.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똑똑하다고 들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나는 B라는 성적에 열광하였다. 그리고 재시험에 또 절망하였다. 의과대학 시절 동안의 매년 단골손님이 되어버린 재시험은 나의 이러한 “똑똑하지 못함을 아는 자각”을 경화(solidification) 시켰고, 졸업 후 이런 자각에 대한 병식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확진(confirmation) 받는 시간을 가졌다.
의과대학에 입학 후, 수많은 재시험들을 봤다. 그 가운데 기억나는 재시험 과목을 꼽으라고 하면, 당연 “신경”이 들어간 과목들이다. “신경해부학”, “신경생리학”, “신경과”, “신경정신과(현재 정신건강의학과)”, “신경외과”, 등등…
“신경”이라는 단어가 나의 신경을 건드린다.
세상은 성적과 결과로 모든 것들을 평가한다. 사람 간에도, 사업체 간에도 그리고 국가간에도 말이다. 인턴 수련의 마무리가 다가오는 늦가을 어느 날 나는, 내과 인턴으로 근무 중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수많은 주사기와 채혈 bottle을 들고, 환자들의 피를 뽑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한국의 한 내과 분야에서, 저명하고 실력 있기로 평판 난 주임 교수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셨다. 그리고 말을 거신다. 순간 내 마음은 뭔가 먹을 것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꼬리를 백만 RPM으로 흔드는 어느 강아지의 설레발 모드로 변했다.
‘아~ 드디어 내 생전 처음으로 나를 인정해 주시는 건가…’
‘아~ 드디어 하늘 같은 교수님이, 나의 성실함과 나의 이 현란한 채혈의 손기술에 감탄하셨는가?’ 라는 환상 속에, 그 주임 교수님께 답한다.
‘앗! 네 교수님! 저 인턴 류상효 입니다.’
‘자네 잠깐 이리로 와 보게, 긴히 할말이 있네.’
그리고 주임 교수님은 나를 병동 한곳으로 데리고 가신 뒤, 나에게 일생일대의 중대한 임무를 맡기신다.
“자네 동기 중 *** 라고 있는데, 참 똑똑하고 성적도 좋은데, 가서 그 친구에게 내과를 지원하도록 자네가 설득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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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 인턴을 마치고, 신경과 인턴의 시작이다.
“신경” 이라는 이 두 글자는 참 나와 인연이 깊다.
학창 시절 나의 지도교수님이 “신경생리학” 전공이었으며, 학창 시절 나의 모든 재시험의 과목에는 “신경” 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가 있다. 물론 그 외 대부분 모든 과목에서 재시험을 보긴 하였지만…… 여하간 신경과 인턴의 시작은 “신경” 이라는 말 자체 만으로 나에게 학창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준다.
아름다운 추억들은 음미하면 할수록, 그 맛이 배가 되고, 나의 자율신경계에 쾌락을 준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은 경험하고 재경험하면 할수록, 나의 잠복기가 짧은 나의 부교감 신경을 마비 시킨다. 시련을 향한 대표적인 예로, 재시험이 선두그룹에 있고, 그 가운데 “신경”이라고 쓴 선수가 선두를 지키고 있다.
어려움이나 악몽, 혹은 난관에 대처하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전(정면돌파)’이고, 또 하나는 ‘회피’ 그리고 마지막 하나로는 ‘체념’이 있다. 어떤 이유에 인지 모르나 나의 무의식 깊이 자리 잡은 무수히 많은 뇌 신경회로들 가운데 하나가 움직인다. 그리고 나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면, 즐겨라.’ 그리고 ‘앞으론 평생 신경과 하고는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열심히 해보자.’
사실 ‘신경과 인턴’으로서의 직업적 역할은 ‘신경과”와 관련된 일하고 조금 거리가 멀다. 인턴 역할의 수행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기에… 인턴의 시절을 겪어본 분들이라면, 나의 이 말에 크게 공감하며 순간 만감이 교차하는 미소를 떠올릴 것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느 대학병원, 아침 회진 시간이다. 신경과 인턴으로 환자의 차트와 필름을 들고 회진행렬의 가장 앞에서 길을 만들어 가며 복도를 걷는다. 순간 갑자기 누군가 나의 어깨를 감싼다. 신경과 주임 과장님이시다. 즉, 신경과라는 한 가정에서 ‘오야붕’이신 그 분이다. 그리고 그 두목께서 내 옆으로 다가오셔서, 나의 어깨를 감싸며, 어깨 동무를 하신다. “신!경!” 이라는 말만 들어도, 나의 모든 자율신경계가 반응하던 나에게…. 그것도 주임과장이시라고 하시는 분께서…
어깨동무다. 정문입설(程門立雪)을 타파하는 바로 그 “어깨동무”였다.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그 주임과장님께서 나에게 말씀 하신다.
“자네. 신경과 해보는 게 어떠한가?.”
“아…… 네…… 넵!”
이렇게 나는 신경과 이병철 교수님의 마법 같은 어깨 동무를 한 뒤 신경과 전문의 수련을 마치게 된다.
기적이 일어났다.
초, 중, 고등학교에서 언제나 중 하 위원에 머물던 나…
6번째 도전 끝에 의과대학에 들어간 나…
의과대학시절, 재시험으로 점철되어 낭만적인 대학교 생활의 방학을 항상 2주간만 즐겨온 나…
졸업 평점 2.8 이라는 시들시들(CDCD)한 성적에 익숙한 나…
신경과 전문의 시험을 통과하게 된다. 그것도 중간 이상의 성적이라는 소식과 함께…
이렇게 나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시험이 좋은 결실로 마무리되는 것 같아,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듯한 희열에 도취된다.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시험을 예상하지 못한 체…
***
전문의를 따고, 공중보건의사로 복무를 해야 한다. 여기서는 지역이 정말 중요하다. 물론, 수도권이 나의 선택이다. 하지만 나처럼 서울 경기권에서 공중 보건의사를 하고 싶은 신경과 동기들이 많았기에 결국 이러한 과잉 공급은 경쟁을 낳고, 이는 시험으로 귀결된다.
공중보건의사 실무에 대한 수업을 듣는다. 집으로 귀가 후 그 다음날 정해진 고사장에서 시험을 본다. 시험 전날 나는 나의 모든 뇌세포를 가동해 밤새도록 외우고 또 외우고, 열심히 외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전과 같다. 똑똑한 신경과 졸업 동기들보다 점수가 낮은 나는 성적에서 밀려, 경기권에서 멀리 떨어진, 영광굴비로 유명한 그 영광으로 발령 받았다.
그리고 내신 성적 6등급으로 6번째 의과대학에 도전에 입학한 것이야 말로, 기적이 아니고선 불가능 했음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공중보건의로의 첫발은 공립 영광 노인전문 요양병원에서 시작했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렸고 그 중에 내 귀에 닳도록 들린 말이 있었는데,
‘공중보건의사 3년 동안은, 의사로서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휴가야. 그러니 잘 즐겨.’
주변에서 열심히 골프를 배우겠다는 둥 그동안 하고 싶었던 취미를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하는 말들이 들린다.
이렇게 새내기 공중 보건의사들은, 각자 임명된 지역으로 가서 지방 단체장들께 인사를 하고 각자들의 숙소를 배정받은 후 그로부터, 며칠 뒤 선배 공중보건의사들과의 첫 오리엔테이션 모임을 한다.
맛깔난 남도의 한 음식점, 지역이 지역인지라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하다.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눈다. 다들 예상했던 데로 영화를 수집하고(CD 로 수집한다. 당시에는 OTT 가 없던 시절이어서), 골프를 치거나, 낚시를 즐기기도 한단다. 하지만, 한 공중보건의는 별말이 없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1년 동안 선배 공중 보건의사로서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 보았다.
“이런 황금 같은, 인생에서 둘도 없는 기회에 뭐 하시고 지내세요?”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 저는 미국의사고시 보려고요. Step I은 통과했고, 지금은 Step II CK 준비 중이에요.”
시험…… 아~ 시험. 또다시 “시험”이라는 소리 들으니, 가슴이 뭔가 불편하다.
“아무개 선생님. 실례지만, 혹시 미국 의사시험 열심히 준비했는데, 떨어지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라고 나는 묻는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류선생님, 미국 의사 USMLE 문제들이 워낙 주옥같이 좋고, 학창 시절 복습도 할 수 있고, 설령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들었어요.”
서른 살 평생 동안 그동안 “시험은 배움이다.”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나에게 그의 대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충격은 나로 하여금, 과거 이병철 교수님과의 어깨동무를 한 뒤 신경과를 선택한 것처럼, 시험을 준비하고 도전하게 만들었다.
공중 보건의 3년의 시간 동안, 4번의 미국 의사고시(Step I, Step II CK, Step II CS and I II)를 보면서, “시험은 배움이다.”라는 큰 깨달음에 의과대학교 전과목을 다시 한번 재시험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뿐 아니라, USMLE 문제 하나하나를 푸는 동안 졸업 후 전공의 과정 동안 배우며 진료하고 경험했던 환자들이 머릿속에 희로애락이 녹아 든 하나의 장편 영화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이렇게 환자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 많구나!.’
‘아 이것도 모르면서, 내가 어떻게 환자를 봐왔단 말인가!’
시험을 준비 하면서 내 평생 이처럼 흥미 진진하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스릴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스릴은 합격이라는 결실로 마무리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미국 캐나다 의과대학 졸업생들의 평균 성적보다 우수한 성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월등하고 특출 난 성적은 아니었기에 쉽게 매칭되어, 미국에서 바로 전공의 수련을 다시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미국 현지에 가서, 나의 성실함을 보여준 뒤 이에 대해 현지 인들의 추천서를 받는 것이 유리 했고, 이를 위해 잠시 미국의 오클라호마에서 무급으로 인턴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어 그곳으로 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기타 개인적인 사정 등을 이유로 다시 한국 행을 택하게 되며, 부산의 한 수련종합병원에서 신경과 과장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부산에 온 뒤 좋은강안병원에 신경과 주임과장이라는 타이틀 하에 전공의 5년 차, 6년 차 그리고 7년 차로서 수련생활을 이어 갔다. 기관 삽관을 하고, 중심정맥주사를 잡고, 심폐소생술을 하는가 하며, 종종 새벽에 응급실로 불려가 급성 뇌경색 환자에게 정맥내혈전용해술을 하기도 했다. 때론 마비된 환자가 드라마틱하게 돌아오는 장면을 목격하면 신경과 의사로서 전율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때론 심각한 부작용 등으로 밤새 중환자실 쪽 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다음날은, 여러 다양한 외래 환자들을 보면서 의학은 내가 그 동안 알고 있었던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결합된 인술임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 신경과를 수료해서 그런지 신경계 질환의 평가가 가장 높게 나왔다.
UNITED STATES MEDIACL LICENSING EXAMINATION, STEP2 CLINICAL KNOWLEDGE(CK) SCORE REPORT

▲ 류상효 원장
글_김준수(해운대백병원 신경과 전공의 2년차)
“모두들 가장 힘들다고 말하는 전공의 1년차
30년 뒤 누군가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난 1년차로 답하진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정말 힘들지 않았기 라기보다는 의사로서, 그리고 새롭게 사회에 발 딛은 한 사람으로서 그 한 해는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설레고 의미 있는 한 해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명탐정 코난’을 좋아했다.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비판적으로 의심하며 현장의 단서를 찾아 다니는 주인공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신경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던 이유도 내가 코난을 좋아했던 이유와 공명한다. 신경과 의사로서 환자의 병력과 증상만으로 질병을 의심하고 여러 검사를 통해 단서를 찾아야 하는 일련의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은 그 어떠한 다른 과들 보다 섬세함을 요구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코난’이 될 수 있다는 설렘과 동시에 잘 해낼 수 있을지, 혹은 신경과가 나에게 맞을 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1년차를 시작했다.
1년차를 하면서 가장 선명하게 내 기억이 각인된 날은 3월 초 당직 시작부터 의식저하, 경련 등으로 찾아온 4-5명의 응급환자들이 동시에 응급실에 나의 처치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날이다. 3년차 선생님께서 소위 말하는 ‘빽 당직’을 서주시고 응급실로 내려가서 환자를 보는데, 환자가 밀려있고 중환도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버린 나머지 다소 압박감을 느껴 보호자의 진술을 손으로만 적고 머리에 담지 못했다. 결국 난 처방을 내지도, 경과기록지를 적지도 못하고 한마디로 ‘얼 빠진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3년차 선생님께서 답답해 하시며 대신 일을 해주셨고 이리저리 설명도 해주셨지만 그 때 어떤 설명을 해주셨는지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순간 “김준수, 정신차려!!”, 3년차 선생님의 외침으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붕 떠있었던 마음을 내려 앉히며 비로소 환자들을 마주하고, 배울 수 있었다. 그 때 크게 배웠던 가르침은 환자가 아무리 밀려있어도 ‘차분하게 한 명씩 꼼꼼히’ 환자를 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것이다.
‘잘 모르겠으면 무조건 윗년차에 연락하고 알아도 연락해라’
이 1년차 인계사항 1번이 ‘나의 1년차’에도 가장 도움이 되었다. 물론 새벽에 전화 드리는 것은 죄송한 마음에 항상 힘들긴 했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윗년차 선생님이나 교수님께 환자 문제로 연락을 드릴 때 어떤 순서로, 어떤 점을 중요하게 말씀 드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글 읽듯 연락을 드렸다. 그 때마다 해주셨던 질문들을 답하기 위해 치열하게 생각하고, 환자들을 반복해서 보면서 점차 어떤 게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난 환자 병력을 읽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의심 진단과 진단 및 치료에 대한 내 나름의 계획을 세우며 선생님, 교수님과 의사소통 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윗년차 선생님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주변 사람들도 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교수님, 전공의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등 의료진 외에도 환자, 보호자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일을 하는 것은 힘든 1년차 생활에 큰 동력이 되었다. 응급실에서부터 협조적으로 의료진을 믿어주는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환자와 의사의 입장이 다르기에 생겼던 갈등을 겪었던 환자와도 퇴원할 때는 웃으며 인사하는 것이 좋았다. 주변 사람에게 조금만 배려하고 마음을 나누면 사람 사이 벽을 쉽게 허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일했고 이를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24시간, 36시간 근무하며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고 쪽잠을 자면서 보냈던 1년의 시간이 그 순간에는 정말 외롭고 힘들게 느껴졌지만 돌아보니 주변에 도와준 사람들이 정말 많았던 것 같다. 새벽에도 내 전화를 받아주던 윗년차 선생님, 힘들겠다며 야식을 챙겨주던 간호사 선생님, “선생님 너무 고생하시네요”와 같이 따뜻한 인사말을 해주시는 환자와 보호자들. 햇병아리 의사가 받았던 여러 따뜻한 감정은 앞으로 의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함’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가깝게는 다음으로 1년차를 겪어야 하는 후배에게, 멀게는 30년 뒤의 후배 의사와 환자, 보호자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고 동시에 풍부한 감정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 해운대백병원 신경과에 들어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힘들지만 외롭지 않았던 수련을 받는 것은 내 인생에 손 꼽히는 행운이 아닐까. 이 글을 통해 그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글_박지욱(제주 박지욱신경과의원)
“센시발(Sensival), 이제 품절입니다. 더 이상 약 없습니다!”
최근에 들은 슬픈 소식이다. 노르트립틸린(nortriptyline)이 더이상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알에 49원이니 생산, 유통, 판매, 재고 비용을 고려하면 원가에 못 미친다는 국내 제약사의 판단에 따라 시장에서 철수했을 것이다.
신경과 의사로 많이 써온 항우울제들 중 가장 사랑을 받은 것이 에나폰(Enafon, Elavil)과 센시발이 아닐까? 환자들이 에나폰을 ‘파란약’, 센시발을 ‘빨간약’으로 부른다는 것을 한참 나중에서 알았다. 물론 우울증 치료제로 쓰기 보다는 다양한 증상 조절에 이 두 알약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파란약이 효과가 좀 더 강하고 부작용도 더 많고, 빨간약은 좀 더 순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전래 동화 속 ‘빨간 구슬과 파란 구슬’처럼 필요한 때에 잘 써왔는데 이제 빨간 구슬을 잃어버려 많이 서운하다.
잘 알겠지만 파란 구슬 에나폰, 빨간 구슬 센시발은 삼환계 항우울제(TCA; tricyclic antidepressant)에 속한다. TCA 중 제일 먼저 나온 것은 이미프라민(imipramine)이다. 이미프라민은 스위스 제약사 시바(현 노바티스)가 프랑스 제약사 롱프랑(현 아벤티스)이 내놓아 공전의 히트를 친 클로로프로마진(CPZ)를 따라잡으려고 내놓은 약이다. 구조가 비슷한 이미프라민을 만들어 도전을 했는데 조현병에는 효과가 없고 우울증에서 치료 효과를 발견해 내놓은 약이다. 인도로 가다가 신대륙을 발견한 컬럼부스의 이야기처럼 흥미롭다. 조현병만큼 우울증도 매우 중요한 병이지 않은가?
여하튼 이미프라민의 성공으로 아미트리프틸린(머크), 데시프라민(가이기), 노트립틸린(가이기), 독세핀이 잇따라 나왔다. 이들 모두 구조가 3개의(tri-) 링(cycle)으로 이루어진 항우울제(antidepressant)라 TCA라고 부른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미프라민과는 다른 종류의 항우울제인 이프로니아지드(iproniazid)를 많이 썼다. 이 약은 1961년에 결핵약으로 나왔다. 많이 쓰는 결핵약 이소니아지드(INH; 아이나)를 약간 변형시켜 효능을 개선시켰는데 뜻밖의 부작용이 나왔다. 중추신경이 흥분된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이런 흥분성이 마음에 안 들어 이소니아지드를 더 선호했지만 1957년에 우울증 치료 효능이 입증되면서 ‘최초의 항우울제’가 되었다.
하지만 뜻밖의 부작용이 또 있었다. 투약 중인 환자가 치즈 혹은 맥주 와인과 먹으면 혈압이 올라가는 부작용이 생겼다. 조사해보니 음식속이 티라민(tyramine)이 원인이었다. 티라민이 아드레날린처럼 작용해 혈압을 올린 것이다. 그 밖에도 신장과 간에 독성이 확인되어 최초의 항우울제 이프로니아지드는 1961년에 퇴출되었다.
어찌 되었든, 이프로니아지드와 이미프라민이 우울증에 효과가 있자 그 기전에 대한 연구도 시작한다. 이프로니아지드는 뇌 속의 모노아민류(MAs;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아드레날린,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를 분해하는 효소(MAO)를 차단해서 모노아민의 농도를 높이는 효과를 냈다. 이미프라민은 신경전달물질 재흡수를 방해해 농도를 높이는 효과를 냈다. 기전은 다르지만 모노아민의 농도가 올라가면 우울증이 나아지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1963년 영국에서는 세로토닌이 우울증을 개선시키는 실험 결과 나왔다. ‘세로토닌과 우울증’ 관계는 1960년대 연구자들의 연구 주제로 인기가 아주 좋았다.
자 이제 세로토닌을 높여야지? 어떻게? TCA의 효능은 유지하면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세로토닌 재흡수만 선택적으로 억제하는 약(SSRI; 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을 만드는 거지!
1981년에는 스웨덴 제약사 아스트라가 최초의 SSRI인 우울증 치료제 젤미드(zimelidine)를 내놓는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길랭-바레 증후군(GBS)이 생겨 시장에서 철수했다. 미국 제약사 일라이 릴리는 수면제로 쓴 항히스타민제 디펜히드라민(diphenhydramine)의 분자 구조를 바꿔 만든 약 플루옥세틴(fluoxetine)을 내놓았다. 1987년 FDA 승인을 받은 이 약이 바로 푸로작(Prozac)이다.
푸로작은 우울증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살도 빠지게 만들고 기분이 좋아지고 활력이 넘치게 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우울증이 없는 사람도 활기찬 사회 생활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의사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될 정도로 열풍이 불었다.
덕분에 1994년 전세계에서 베스트셀러 약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1등은 위궤양 치료제 잔탁(Zantc)). 사람들에게 푸로작은 비아그라와 더불어 행복을 가져오는 약이란 뜻으로 ‘해피 드럭’으로 불렸다. 생각해보면 어쩌면 푸로작은 미국 사회가 요구하는 식지 않는 열정과 불굴의 투지를 위해 맞춤형으로 나온 약처럼 보였다. 과거 같으면 정신과 약을 먹는다고 고백하긴 어려웠지만 사람들은 푸로작 정도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너나할 것 없이 먹었다.
심지에 반려견들도 분리 불안증을 없애려고 플루옥세틴을 먹인다고 한다. 사람, 동물 가리지 않고 먹으니 소변으로 배출되는 대사 물질이 강으로 스며 들어 물고기의 뇌활동마저 영향을 준다는 보고가 미국 텍사스에서 나왔다. 어쩌면 물고기들이 본의 아니게 행복하고 힘이 넘쳐나는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상관없을까? 지난 주 해수욕장 근처에서 아주 높이 뛰어노는 숭어들을 많이 보았는데 녀석들의 뇌 속 세로토닌 농도가 어떤 지 괜스레 걱정이 된다. 우리나라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겠지?

▲ SSRI와 무관하게 춤추는 돌고래, 제주
** 참고문헌 **
1. 브레인 케미스트리/지니 스미스 지음/양병찬 옮김/위즈덤하우스/2023
2. 이야기 현대약 발견사/강건일 지음/까치/1997
3. 정신의학의 역사/에드워드 쇼터 지음/최보문 옮김/바다출판사/2009
4. 인류에게 필요한 11가지 약 이야기/정승규 지음/반니/2020
5. Fish on Prozac; Antidepressants end up in fish after flowing from sewer to stream.(https://www.science.org/content/article/fish-proz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