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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의사의 취미생활
-Neurology Musician-
글_남경식(현대유비스병원)




1.간단한 자기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이자,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인 인천시 미추홀구 소재 종합병원 현대유비스 병원에서 신경과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전문의 15년차 남경식이라고 합니다.



2. 음악 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현재 저는 Abellian이라는 이름의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에 있습니다. 2016년에 Abellian piano 1st single 이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피아노 연주곡 “Peace the blue”, “Hope for Peace"를 발표했고요, 지난 해 8월에 “Relic of Life”, 11월에는 “Relic of Angel”이라는 곡을 각각 발표했습니다.
2012년부터 3년간 길가는 밴드라는 팀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했었으며, 피아노 연주곡 “SW416 : Over The Deep Sea”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는 인천시 소재 계산제일교회 4부 찬양팀 “WE Worship”에서 활동 중입니다.


제 곡 중 최초로 발표되었던 곡은 2000년 칼라기획에서 발매한 「결혼축하해요」앨범에 수록되었던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 아래”라는 곡이었습니다. 이 곡은 2000년대부터 최근에까지 여러 결혼식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TV드라마의 결혼식 장면에서 삽입되기도 했습니다. 작년 5월에 이곡을 리메이크해서 다시 발표하기도 했지요.
길가는 밴드 활동기간 중엔 “길가는 밴드 EP1” 앨범에 참여하였고, WE Worship 합류 이후로 3번의 디지털 싱글앨범에 자작곡 3곡(“흐르네”, “애가”, “예수 그 빛으로”)을 포함해 지금까지 6곡에 작·편곡자 및 연주자로서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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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3월, 나니아의 옷장이라는 공연장에서 있었던 길가는 밴드 공연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 우리 공연의 전 순서에 전설적인 베이스시트인 김진씨의 공연이 있어서 많이 긴장했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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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6월 17일, 합정동 공연, 이날은 이듬해 발표된 ‘Relic of life’의 초연일이기도 했다.


그 외에 부천 시민오케스트라에 첼로주자로 2년 전에 합류하여 부천시민회관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정기공연에 참여하였습니다.


3. 발표하신 곡들에 대한 에피소드나 곡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지금도 결혼식에서 축가로 많이 불려지는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아래”는 대학시절 IVF(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지도 간사님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지금은 제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가 쓴 가사에 곡을 붙인 곡입니다. 2000년에 이 곡이 칼라기획의 결혼 축하앨범에 실리면서 많이 알려지게 되었구요. 이 곡이 발매될 무렵, CD를 지도교수님이셨던 이병철교수님께 선물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교수님께서 당시 선물을 받으시고서 의국에 피아노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하시기도 했었지요. 한번은 어느 학회에 갔었다가 옆의 홀에서 진행 중이던 어느 결혼식에서 이 곡이 축가로 불리는 것을 듣기도 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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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발표했던 곡 “SW416 : Over The Deep Sea”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세월호 사건에 대한 아픔을 담은 곡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하셨겠지만, 거대한 비극 앞에서 제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작은 몸짓이었지요.

2016년에 발표된 두 곡 “Peace the Blue”, “Hope for Peace”는 평화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이 많던 시절에 쓰여진 곡입니다. 특히 “Hope for Peace”라는 곡은 평화에 대한 열정 때문에 2003년에 벌어진 이라크 전쟁에 인간방패로 전쟁터로 향했던 한 여성 평화활동가의 삶에 감동을 받아 만든 곡으로, 저와 비슷한 연배였던 그 분과의 만남은 정해진 수련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되는 의사의 일반적인 길을 걸어왔던 저에게는 제법 큰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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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에 발표된 “Relic of Life”라는 곡은, 매일매일 똑같은 삶이 반복되는 데서 오는 지독한 일상 속 고독으로 부터 나온 곡입니다. 당시는 사춘기 자녀들과의 관계의 어려움과 근무하던 병원에서의 스트레스 등 여러모로 정서적으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외로움 속에서 지쳐가고 있었지만, 그러한 삶 또한 시간이 지나 언젠가 제 삶의 유적(Relic)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담아 곡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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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1월에 발표된 “ROA(Relic Of Angel)”이라는 곡은 친한 친구의 어린 딸이 뇌종양으로 하늘나라로 간지 1주기가 되는 날, 발표된 곡입니다. 이 곡의 제목은 사랑스러웠던 그 아이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그 아이를 아꼈던 제 아내와 또 다른 아티스트가 각각 피아노와 보컬로 참여한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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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017, 2018년 세 번에 걸쳐 발표된 WE Worship 앨범에는 총 6곡이 발표되어 있습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고민하는 바를 담은 예배음악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특별히 이 노래들은 지역교회의 소속된 이들이 스스로의 고백을 담은 곡을 만들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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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발매되지는 않은 곡이지만, 아들과 함께 만든 곡도 있습니다. 아들의 영어 이름을 딴 ‘Kevin’s Epic’이라는 제목의 곡인데, 막내아들이 어릴 적 만들었던 멜로디에 제가 오케스트레이션을 해서 완성된 곡입니다. 작곡에 재능을 보이는 아들의 미래에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이후로는 아이는 더 이상 곡을 쓰지는 않고 있답니다. 그러나 언젠가 재능을 꽃피울 날이 올 거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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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와 지금까지의 음악 여정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약 5년간 피아노를 배웠었던 것이 제가 음악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 첫 번째 계기였습니다. 장난기 많은 어린 시절임에도 특이하게도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고도의 집중력으로 한 시간 내내 연습에만 열중하곤 했었습니다. 특히 슈베르트의 즉흥곡들 op. 90번의 네 곡을 좋아했습니다. 이 곡들은 피아노를 몇 년 배우면 거쳐 가는 유명한 곡들인데, 저는 특이하게도 그 중에 제일 유명하지 않은 첫 번째 곡(C minor)에 마음을 빼앗겼었지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곡을 흉내 내어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로 조금씩 저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집 근처의 군인교회에서 반주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절엔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요. 매주 연주하는 클래시컬한 기독교 성가곡들을 통해 음악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는 점과 당시 기독교 음악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던 주찬양선교단의 곡들을 통해 코드와 화성에 대한 개념을 익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교류하던 군인아저씨들을 통해 클래식 기타를 배울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중2 무렵부터 피아노학원을 그만두게 되고, 군인교회 반주자도 그만두게 되면서 공백기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부천지역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맘에 맞는 교회 친구들과 함께 중창단을 조직하였고, 제가 만든 곡을 부르기도 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알아보니, 그 당시에 만들었던 중창단이 지금도 계속 존재한다고 해서 감회에 젖었던 적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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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시절 작곡했던 피아노 연주곡. 나름 백과사전 뒤져가며 소나타형식에 대해 공부한 뒤 만든 곡인데 지금 보니 2악장까지 밖에 없는 미완성곡이다. 이 곡의 1악장을 중3 학교 예술제 때 연주하기도 했었다. 지금 보면 부족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지만, 추억에 남는 곡이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는 선교단체 IVF 내의 찬양팀에서 활동하면서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등을 연주하곤 했었습니다. 이 시절에는 흔히 CCM이라고 부르는 복음성가를 작곡하고, IVF 모임 때 부르곤 했었습니다. IVF전국 수련회 때 주제곡을 편곡하기도 했었구요. 위에서 소개드렸던 축가곡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 아래”라는 곡도 이 무렵에 쓰여진 곡이었습니다.

이후 수련의 과정을 거치는 기간과 전문의가 된 이후까지 약 10여년간은 음악에 관해서는 가끔 곡을 쓰는 것 외엔 특별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40세를 눈앞에 둔 시기에 다시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5. 의사와 음악을 병행하면서 겪는 어려움이 있지 않나요?


일차적인 어려움은 체력적인 부분입니다. 음악을 하는 시간은 결국엔 퇴근한 이후일 수밖에 없는데, 이 시간대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고갈되어 피곤에 쓰러지는 날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매번 목표한 만큼 음악작업을 하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교회 찬양팀에서 활동하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하다보니, 주말에 충분히 쉬지 못하여 만성피로를 악화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하구요. 해가 갈수록 체력관리의 중요성을 나날이 느낍니다. 재정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는 부담되는 부분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음원시장이 아티스트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다보니, 대개는 음악에 투자한 만큼의 수입이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좋은 악기나 장비를 소유하고픈 욕심이 계속되기도 하구요. 고맙게도 아내가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있어서 음악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하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내적인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계속 무엇인가를 창조하기 위해선 무언가 내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동기와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제한된 경험과 제한된 일상 속에서 예술적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매일매일 같은 곳에서 같은 일상생활이 반복되지만, 예술적인 시각으로 매순간을 느껴보고자 노력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면 제 속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작품들이 하나 둘씩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늙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 향후 활동 계획은 어떠한지요?


올해에는 Abellian piano의 피아노 연주곡들을 몇 곡 더 발표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이러한 뉴에이지 스타일의 피아노 음악이 어느 정도 누적되면, 이후로는 피아노와 현악기를 제 방식대로 조합하는 시도를 해보고 싶습니다. 이탈리아의 음악가인 Ludovico Einaudi의 음악이 제가 향후 해보고 싶은 음악의 롤모델입니다. 궁극적으론 현악을 넘어서서 관현악 작·편곡을 해 보고 싶기도 하구요. 한편으론, 이러한 연주음악과는 다른 방향으로 노래곡들을 쓰고 발표하는 시도도 계속 해 볼 예정인데요. 아무래도 예배곡이나 CCM 위주의 곡들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재 소속되어 있는 ‘WE worship’에서의 음악작업 뿐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제 노래 곡들을 “Abellian song”의 이름으로 하나 둘씩 세상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종속되어 살아가기보다는 신앙과 좋은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으면 하고, 그런 생각들이 제 음악에 담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좀 더 들어, 걸어왔던 길을 돌이켜 볼 때 제 음악들을 통하여 제 삶의 단편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그게 제가 꿈꾸는 Relic of Life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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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 당시의 WE Worship 밴드의 모습. 이날은 ‘ROA(Relic of Angel)’의 초연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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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5월, 길가는 밴드 활동 당시 원주에서 있었던 선교한국 행사에서 버스킹을 하는 장면, 맨 우측의 건반 연주자는 필자의 아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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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10월, 부천시민오케스트라 정기 공연, 우측 세 번째 첼로 주자가 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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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fe B;rain
뉴롤로지(neurology)의 시작, 토머스 윌리스
글_박지욱(제주 박지욱신경과의원)




뇌의 작용을 설명하는 것은 영혼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작업이다.
… 뇌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만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토머스 윌리스 『뇌와 신경의 해부학』, 16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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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윌리스_위키백과 자료



토머스 윌리스(Thomas Willis; 1621~ 1675)는 1621년 영국 서남부의 윌트셔(Wiltshire)에서 농장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Christ Church, Oxford) 대학에 입학했다. 교수의 집에서 일을 해주며 장학금을 받았던 윌리스는, 약을 지어 팔던 안주인의 일도 거들어주었다. 이때 파라켈수스(Paracelcus; 1493~1541)의 의학을 접하게 된다.
당시에 크라이스트처치를 졸업하면 대부분 영국 국교회(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국교회의 독실한 신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윌리스 역시 졸업 후 그 길이 보장되었지만 5년의 학업을 마친 후 의학으로 진로를 바꾼다. 하지만 7년의 의학교육을 앞두고 윌리스는 영국 정치사의 대격동 속으로 휩쓸리게 된다.
당시 국왕이자 국교회의 수장은 찰스 1세(Charles I; 재위 1625~ 1649)로 아버지 제임스 1세를 이어 천부왕권설(divine right of kings)을 신봉한 전제군주였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의회를 무시했으며, 과도한 세금을 매겼고, 일부 귀족과 상인에게 이권을 몰아주었으며, 국교회를 제외한 다른 종교는 탄압했다. 의회는 이에 맞서 국왕에게 <권리청원>을 제출하였고 국왕은 이를 수용하는 척했지만 이듬해에 의회를 해산했다. 이것이 영국 내전(The English Civil War; 1642~1651)을 촉발했다.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 1658)은 탄압받던 청교도(퓨리턴)와 의회의 군대를 지휘하여 런던을 점령했고, 그 결과 국왕을 비롯한 왕당파는 옥스퍼드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대학에는 휴학령이 떨어졌고, 교사(校舍)는 왕당파 군대에 징발되었다. 윌리스는 옥스퍼드의 수비대에 자원입대 하였는데(1644년, 23세), 이 사건이 그의 남은 30년 인생의 거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전제군주 찰스 1세와 옥스퍼드의 ‘학도의용군’ 윌리스는 아무런 개인적인 인연이 없다. 하지만 국왕은 그에게 몇몇 행운을 안겨준다. 첫째는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를 만나게 된다. 당시 일흔을 바라보던 하비는 국왕의 시의로 옥스퍼드에 있었다. 하비는 이미 실험 연구를 통해 처음으로 심장을 중심으로 온 몸의 혈액이 순환하는 이론을 세웠던, 순환생리학의 아버지다(『심장의 운동(De Motu cordis), 1628년)』. 옥스퍼드에서 하비는 국왕과 측근의 진료를 도맡는 한편, 젊은이들과 함께 연구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의학을 가르쳤다. 하비의 실험주의, 실증주의는 윌리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윌리스는 하비를 평생의 롤모델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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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하비_위키백과 자료



1646년에 윌리스는 의사의 학위를 받았다. 내전의 와중이라 제대로 된 의학 수업을 받지도 못했지만 국왕은 윌리스의 충성심에 대한 보답으로 속성으로 의사 면허를 준 것이다(전쟁 중에는 그런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무렵, 전황은 왕당파에게 확실히 불리하게 돌아간다. 1646년 4월이 되자 찰스 1세가 옥스퍼드를 빠져나갔다. 구심점을 잃은 왕당파 군대는 결국 6월에 자진 해산하는 조건으로 항복한다. 의회군은 옥스퍼드에 진군하여 왕당파를 색출하고 국교회 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패잔병 신세였던 윌리스는 옥스퍼드의 시골 장터를 떠도는 의사로, 연금술을 연구하는 의사로 은둔하며 10년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지적인 활동마저 침체기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학문적 전통이 강한 옥스퍼드에서 그는 렌, 로워, 하비, 뉴턴, 보일, 후크, 로크 같은 과학자들과 실험 클럽을 만들고 지적인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1649년에는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이 선포된다. 하지만 윌리스는 여전히 국교회를 지지했고, 망명 정부의 새로운 국왕 찰스 2세에게 충성을 바친다. 그는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비밀리에 성공회 미사 모임을 여는 등 비밀 왕당파 결사 조직을 이끌었다. 그들은 봉기를 계획하고, 비자금을 모으고, 반 크롬웰 운동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그의 의학 연구에도 진전이 있었다. 보일을 통해 얻은 새로운 물리학 이론이 하비의 해부학에 더해져 새로운 의학의 자양분이 되었다. 아울러 동료들과 동물 실험을 했고, 수혈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했다.
그 동안 공화국을 이끌던 크롬웰은 어느새 찰스 1세와 같은 독재자가 되었다.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했고(1653년), 스스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민중들의 분노가 들끓어올랐고, 1658년에 크롬웰이 죽자 기다렸다는 듯 찰스 2세를 국왕으로 받아들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1660년).
옥스퍼드에서도 권력 교체가 일어났으며, 왕당파들과 국교회신자들이 다시 득세를 한다. 윌리스는 비밀 왕당파 결사체의 지도자 활동을 인정받았고, 가톨릭과 비 국교회파 신자들이 쫓겨난 옥스퍼드에 자연철학 교수로 임용된다.
하지만 윌리스는 15년 전의 어수룩한 의사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사상의 세례를 받았기에 파격적이고도 신선한 강의를 했다. 아울러 혈관과 혈액 연구도 계속했다. 자연스럽게 뇌의 혈관에도 관심을 가졌다. 아울러 뇌혈관을 통해 피를 공급받는 뇌도 그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뇌를 해부하고, 그의 동료인 렌(Sir Christopher Wren;1632~1723)은 윌리스가 해부하는 뇌를, 로워(Richard Lower; 1631~1691)는 뇌 신경 지도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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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렌_위키백과 자료



1661년~1663년에 윌리스의 연구는 몇 가지 중요한 성과를 얻었다.
4개로 나누어져 뇌로 올라가는 목의 동맥들이 뇌에 들어가기 직전에 외곽 순환도로처럼 서로 연결된다(circulus arteriosus cerebri 로 명명; the Circle of Willis). 한 쪽 경동맥이 막혀도 다른 쪽 경동맥을 통해 혈류가 우회하여 유지된다. 뇌간에서 올라온 ‘줄’이 뇌의 깊은 부분으로 퍼져나간다(corpus striatum으로 명명). 뇌에서 뻗어나온 신경이 혀, 성대, 입술, 치아, 심지어는 횡경막까지 내려간다. 그 외에도 optic thalamus, vagus nerve, corpus striatum, anterior commissure, internal capsule, … 등등에 이름을 붙였고 우리는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
1664년에 윌리스는 자신의 신경 연구를 다듬은 저서 『뇌와 신경의 해부학(Cerebri anatome: cui accessit nervorum descriptio et usus; The Anatomy of the Brain and Nerves)』을 출판한다. 그 즈음에 자신의 연구에 ‘neurologie’ 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그는 최초의 neurologist 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55년 전의 일이다.
한편으로는 그는 아주 성공한 개원의였다. 처음 정착한 옥스퍼드에서는 최고의 부자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했고, 국교회 대주교의 권유로 런던의 세인트마틴레인(St. Martine Lane)으로 이주한 후(1667년)에는 영국 아니, 전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자신의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에 인체 해부는 사형수들에게만 제한적으로 할 수 있었지만, 윌리스에게는 환자들의 부검도 허용되는 특혜가 주어졌다. 그는 더 많은 인체, 더 많은 뇌를 연구했고, 급기야 뇌 속에서 인간 정신의 최고 정수인 영혼의 거처를 찾는 ‘영혼의 해부학’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는 54세이던 1675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막대한 유산은 자선 기관에 기부되었고, 그의 고단한 몸은 웨스트민스터에 안치되었다.
시골 농장에서 태어나, 16세에 옥스퍼드의 학생, 23세에 의사, 40세에 옥스퍼드의 교수, 43에 ‘신경학’ 명명, 54세에 사망한 것으로 그의 삶을 한 줄로 요약할 수는 있다. 우리 신경과 의사들은 그의 이름을 혈관(the Circle of Willis )에서만 기억하고 있지만 더 나아가, 신경학(neurology)의 명명자이자 최초의 신경의학자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면 좋겠다.



**참고문헌**

1. 영혼의 해부(Soul Made Flesh by Carl Zimmer, 2004)/칼 지머 지음/조성숙 옮김/ 해나무/2007
2. 한 권으로 보는 세계사 101장면/김희보 지음/가람기획/1997
3. Neurological Eponyms/edited by Peter J Koehler, George W Bruyn, John MS Pearce/Oxford University Press/2000
4. https://radiopaedia.org/articles/circle-of-willis
5. https://www.famousscientists.org/thomas-willis/
6.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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