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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신경과 의사로 살아남기

글_이상원(하양맑은신경과의원)



“쇼가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반복이 되면 진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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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영화 「The Greatest Showman」 2017


위 대사는 아침마다 제가 진료 시작 전에 주문처럼 외우는 말입니다.
신경과 의사로 살아남기 이전에 의사로 살아남기, 그 이전에 모든 자영업자로 살아남기에 있어서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상인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팔기 위해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의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두뇌를 총동원하여 환자를 낫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정보의 전달은 일방적입니다. 환자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불편한 점을 얘기하고, 몸을 통해서 불편한 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런 일방적인 정보를 가지고 우리는 일방적인 처방을 환자에게 내려야 하며, 우리의 처방에 환자는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서 약간은 환자의 선택권이 주어지기도 합니다만, 사실 그 선택권은 그다지 많지가 않아서 의사들이 머릿속으로 결정하고 있는 몇 가지 옵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유튜브에 보니까 마그네슘이 좋다고 해서 처방받으러 왔어요.”


인터넷에 보니 이 병이 나랑 딱 맞더라, 친구가 이럴 땐 이렇다고 하더라, 홈쇼핑에서 이럴 땐 이게 좋다고 하더라, TV명의에 나온 얘기가 나랑 똑 같더라…….

진료실에 앉아 있으면 지겹도록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는 게 짜증이 납니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가 들어갈 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머리는 멍해지고, 가슴은 답답해집니다. 때로는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라는 병원에 온 목적을 무색하게 만드는 해괴망측한 논리로 무장한 환자들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터넷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친구가 이 환자분을 내게로 인도했습니다. 홈쇼핑에서 광고하는 약을 사 먹는 대신에 병원을 찾았고, TV명의를 찾는 대신 나를 찾아왔습니다. 비록 잘못된 정보를 믿고 있지만, 많고 많은 병원들 중에서 나를 찾아왔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어느 정도 나를 신뢰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과 술기들로 환자의 잘못된 믿음을 바꿔 주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고, 환자는 비록 어이없는 이유로 나를 찾아왔지만, 주위에 있는 수없이 많은 병원들 중에서 나를 가장 신뢰해서 찾아온 분입니다.

우리는 치매, 파킨슨병, 뇌졸중, 긴장성 두통 등 대화도 힘들고, 몸도 마음도 힘든 환자들을 끊임없이 보고, 그분들과 최선을 다해서 대화하는 신경과 의사입니다. 처음 마음가짐대로 환자를 본다면 어떤 환자가 오더라도 감정 상하지 않게 나의 팬으로 만드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적인 흔들림이 없이 환자를 진심 어린 마음으로 대하기! 참 쉽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의사의 영혼을 후벼 파는 듯한 이런 얘기들만 자꾸 꺼낼까? 모두가 아시는 것처럼 답은 둘 중 하나입니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마음까지 아프거나, 아니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몸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어디가 아프든 분명 많이 아픈 환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환자를 낫게 하는 것이 직업인 의사입니다. 게다가 환자는 나의 고객입니다.

저처럼 천성이 친절하지 못 한 의사는 보듬어 드리기 위해 마음껏 쇼를 해야 합니다. 자꾸만 쇼를 하다 보니 쇼가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이 습관은 저의 진심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인 것 같습니다.


“자꾸 오기도 귀찮은데 두 달 처방은 안 됩니까?”


얼마 전 개원하고 있는 다른 원장님께서 환자들이 자꾸 장기 처방을 원해서 고민이라는 얘기를 제게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사실 장기처방이 많이 쌓이면 고민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무조건 한 달 처방밖에 안 된다고 하거나 마지못해 장기 처방을 하는 것보다는 환자들이 병원 오는 날을 기다려지게 만드는 방법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거동이 불편해서 외출을 잘 안 한다는 환자들께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가끔은 외출을 하는 것이 좋으며, 그래야 게을러지지도 않고 몸을 꾸미게 된다고 얘기합니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오실 때만큼이라도 집에 있는 옷 중 제일 깔끔한 옷을 차려 입고, 화장도 예쁘게 하고 오시기를 권합니다. 물론 환자의 넥타이 하나, 립스틱 하나라도 잘 꾸미기 위해 노력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꼭 알아차리고 크게 칭찬을 합니다. 몇 번이 반복되면 환자들은 병원에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되고, 제게 오는 날이 한 달 중에 가장 중요한 날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파킨슨병 환자는 대퇴골절도 다른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중에도 제게 약 타러 오기 위해 외출 후 집에 가서 화장하고 저희 병원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가서 입원하신 분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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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영화 「남과여: 여전히 찬란한」(Les plus belles annees d’une vie, The Best Years of Life, 2019)


의사가 먹고살기 위해 꼭 이래야 할까요? 당연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자를 기쁘게 하고, 덜 아프게 하고, 더 젊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이것이 시골 신경과 의사의, 시골 주치의의 삶입니다.

이런 생활이 재미와 보람이 있겠다고 생각되시는 선생님들께는 구도심이나 도시 외곽지역 개원도 권해 드립니다. 이런 지역은 고령 인구가 많아서 실제 환자군은 인구수에 비해 참 많은 편입니다.


“병원 다 똑같은데, 혈압약 아무 데서나 타면 되지!”


병원 진료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무엇보다도 실력입니다. 저는 사실 개원을 준비하면서 시골 지역에 무궁무진한 신경과 환자들을 어떻게 잘 볼 것인가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실력이지만, 제가 있는 동네에서는 저 정도의 실력이면 두통, 어지럼증, 치매, 뇌졸중, 통증 등의 신경과 환자를 보는 데 있어서는 부족함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경과 전문의니까요… 제게 부족함이 느껴지는 경우 상급병원으로 의뢰하면 됩니다.

다만 고혈압, 당뇨병과 같은 만성 환자의 관리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을지에 대해 더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저희 동네에는 내과의원이 여섯 군데가 있는데, 저를 믿고 찾아 주시는 분들께는 최선의 치료를 받게 해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원의 연수강좌나 제약회사 주최의 세미나, webinar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많이 채우고 있습니다. 기초적인 부분부터 생각보다 전문적인 부분까지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으며, 또 각 분야의 훌륭하신 선생님으로부터 환자를 돌보는 방법에 대한 팁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보다 섬세한 생활습관 관리나 식습관 관리로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 무데서나 탈 수 있는 혈압약을 처방해 주는 병원 중 하나가 아닌, 꼭 그 병원을 가야만 하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야만 하는 특별한 병원을 만든다면 선생님들의 병원은 동네의 만성질환자들의 핫 플레이스가 될 수 있으며, 열심히 공부하시고 열심히 진심 어린 쇼를 하신다면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성 질환 관리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의사는 고령 인구 진료를 많이 하고, 감정 장애가 있는 환자 진료를 많이 하면서 내과계 질환의 진료 경험이 풍부한 신경과 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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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fe B;rain


신경과 의사라면 바퀴벌레를 볼 때마다 생각해야할 이름, 베르타 샤러!

  글_박지욱(제주 박지욱 신경과의원)




지역에 내분비학회 세미나에 처음 간 날 기억이 난다. 내과 의사들이 어, 신경과 의사가 왜 왔어요? 하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게, 그러니까, 오늘 쿠싱병 강의가 있길래 들으러 왔어요. 아, 그렇지 뇌하수체도 내분비기관에 속하지…. 하지만 나는 ‘뇌에 있는 내분비기관’이라고 속으로 말해주었다.

내분비기관은 다른 말로 호르몬을 분비하는 샘이다. 우리 몸에는 9개가 있다. 갑상선, 부갑상선, 부신, 췌장, 정소, 난소, 송과선, 뇌하수체, 시상하부 이렇게. 그러고 보니 ‘구몬샘(?)’중 무려 3개가 신경과 의사의 손에 들어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송과선, 뇌하수체, 시상하부를 내분비 기관이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만약 베르타 샤러가 들으면 무척 섭섭하다 할 것이다.

베르타(Berta V. Vogel)는 1906년에 뮌헨에서 유복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생물학에 흥미를 느껴 생물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뮌헨 대학교에 진학했다. 나중에 노벨상을 받을 프리쉬(Karl von Frisch) 교수의 지도로 행동생물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1934년에 연구원 생활 중에 만난 생물학자(나중에는 의사가 되는) 에른스트(Ernst Scharrer)와 결혼했다. 그때는 몰랐겠지만 평생의 동반자이자 공동 연구자의 길이 시작되었다.


에른스트는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의 뇌연구소장이 되어 부부는 프랑크푸르트로 옮겼다. 하지만 베르타는 남녀 차별의 벽에 막혀 변변한 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무려 20년 동안). 하는 수없이 무급 연구원직을 받아들여 들여 연구를 계속한다.
에른스트는 1928년에 잉어의 시상하부의 뉴런 일부가 분비하는 입자를 발견했고 그 세포를 ‘nerve-gland cell(신경-분비 세포)’로 불렀다. 이것은 신경에도 내분비기관이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허황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에는 신경이란 정보를 전기 신호로 전달하는 기관으로 여겼다. 그런데 뉴런이 분비도 한다? 허황된 주장으로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아직 시냅스에서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해 신호를 전달한다는 생각도 없었으니. 그래서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다. 베르타는 무척추동물을, 에른스트는 척추동물을 연구해 신경계에 숨어있는 내분비 구조를 찾기 시작한다.
1930년대 중반에 베르타는 달팽이나 지렁이 같은 무척추동물에서 신경 분비 세포를 찾아낸다. 이 말은 진화론적 관점으로 보면 척추동물이 신경 내분비 기능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신경내분비 기능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즈음 두 사람의 신변에 변화가 생긴다. 나치 정권이 탄생하고 본격적인 유대인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하는 수없이 두 사람은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빈털터리 신세로 1937년에 독일을 탈출해 미국으로 간다. 이듬해에 에른스트는 록펠러 연구소에 일자리를 얻지만 베르타에겐 무급 연구원 자리밖에 없었다. 사실상 몸만 간신히 빠져나온 처지라 연구비를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베르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척추동물 즉, 벌레들을 잡아 연구를 계속한다. 그러다가 뜻밖의 행운을 만난다. 바로 바퀴벌레! 아마 벌레 잡는 모습을 자주 보았을 건물 관리인은 어느 날 베르타에게 바퀴벌레를 건네준다. 그 바퀴벌레는 미국 토종보다 덩치가 두 배는 되는 슈퍼 바퀴벌레였다. 그 바퀴벌레는 당시에 미국에 밀입국한 남미산이었다.
덩치가 큰 만큼 머리도 큰 바퀴벌레를 보자 베르타는 뛸 듯 기뻤을 것이다. 벌레의 뇌를 미세 수술 수준으로 살펴야 하는 그녀에게 이보다 고마운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돈도 안 들고. 바퀴벌레는 이후로도 줄곧 그녀의 연구 재료가 되었다.
베르타는 바퀴벌레의 뇌 속에서 변태(metamorphosis)를 조절하는 corpus allatum 과 corpus cardiacum의 분비 기능을 밝혔다. 에른스트가 연구한 척추동물의 신경 분비 기능과 대조해본 결과 시상하부-뇌하수체 시스템과 같은 것이었다. 1950년대 초에는 신경 자극이 시냅스에서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이루어진다는 개념도 널리 수용되었기에 이제 더 이상 뉴런의 ‘분비’기능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학계에서도 이 두 사람의 연구가 신경 내분비학의 출발점으로 인정하였다.
1965년 에른스트는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는 사고를 당한다. 홀로 남은 베르타는 연구를 중단하지 않고 신경 내분비의 미세 구조에 매진했고 88세로 죽는 날까지 연구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편, 바퀴벌레에 대한 그녀의 신경내분비 연구를 기리는 의미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된 바퀴벌레에 그녀의 이름을 따 에스칼라 샤러애(Escala scharrerae)로 명명했다.

자, 샤러 부부의 신경 내분비학 연구 덕분에 우리 신경과 의사들도 떳떳하게 내분비학회에 참석해도 된다. 더 나아가, 아직은 미개척지나 다름없는 신경 내분비학에도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연구해보면 좋을 것 같다. 신경 내분비학은 내분비 의사들에게 내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혹시 모른다. 이 영역에서 뇌의 비밀이 풀린 열쇠를 발견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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