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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 의사의 취미생활


- 슬기로운 신경과 의사 생활 -

  글_장민욱 교수(한림대학교 동탄성심병원 신경과)



1996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모아둔 용돈을 들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 용산 전자랜드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나는 상인들의 손쉬운 먹잇감이었고 호객행위에 여기저기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 도망치듯 상인들의 눈을 피해 제일 조용해 보이는 가게에서 결국 호갱을 당해 거금을 들여 동그랗고 납작하게 생긴 최신 CD 플레이어와 고급 이어폰을 구매했다.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가는 동안 CDP를 만지작거리면서 각종 기능들을 하나하나 섭렵했었다. 워크맨이 주종을 이루던 당시 CDP를 가졌다는 것은 엄청난 관심을 받을만한 일이었다. 수능 시험도 끝났겠다 한참 물이 오른 나는 하루 종일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농구를 하러 다니곤 했다. 그러다 한 체육관에서 농구 게임 쉬는 시간마다 누워서 음악을 들으면서 박자를 맞추고 있으니 함께 게임을 하던 분이 말을 걸어왔다. 밴드 시나위의 객원 드러머였다. 새로 사온 최신형 CDP에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그렇게 그분과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체험 삼아 찾았던 밴드 연습실에서 드럼을 배울 기회가 생겼고 비트에 맞춰서 스틱을 휘두를 때 느껴지는 희열감은 정말 대단했었다.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이 좋다는 것도 있지만 악기를 처음 배우는 바로 그날부터 기본 박자를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초반의 성취감도 좋다는 점이 드럼의 큰 장점이다.

그렇게 록 음악과 밴드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던 차에 경희의대 입학일이 다가왔다. 입학일 수일 전에 내가 살고 있던 충주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열렸는데 행사 중 선배들의 그룹사운드 공연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고, 오리엔테이션 합숙을 하면서 그룹사운드 동아리에 곧바로 지원을 하게 된 것이 나의 밴드 생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룹사운드의 특성상 오디션의 성격이 있는 신입생 환영회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정신 단원으로 인정을 받고 무대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기타나 베이스, 그리고 보컬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쉽게 접할 수 있는 파트여서 잘 다루는 동기생들이 많았지만 이제 막 드럼을 배우기 시작한 나로서는 다 같이 하는 합주에서는 실수를 연발했고 한 박자 틀릴 때마다 벌주를 마시니 연습을 시작한 지 1시간도 안되어 만취 상태가 되기도 했었다. 그렇게 조금씩 실력을 늘려 신입생 환영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식 동아리 멤버가 되었다.

드럼에 재미를 붙이던 예과 1학년 말에 겨울방학을 맞아 동기생 중 가장 출중한 음악적 재능을 가진 기타리스트 조대원 선생과 함께 나의 고향인 충주에서 밴드를 조직해서 공연을 해보기로 했다. 보컬을 맡아줄 사람으로는 고등학교 동창생을, 베이시스트로는 충북지역 중·고교 밴드 경연에서 우승을 했던 고등학생 베이시스트를, 키보드로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분을 섭외하여 공연 팀을 조직했다. 빈 공터에 버려진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해서 만든 연습실은 한 달간 우리 밴드의 보금자리였고 하루 종일 음악을 듣고 연습을 하면서 실력을 더욱 갈고닦았다. 그렇게 생애 처음 티켓을 팔아 록카페 단독 콘서트를 하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당시 에피소드는 1부 공연이 끝나갈 무렵 베이스드럼이 찢어져 소리가 나지 않아 플로어탐 이라고 부르는 북을 대신 치느라 팔이 아파 아주 혼이 났었고, 대충 테이프로 응급수술을 시킨 다음에야 2부 공연을 할 수 있었는데 마침 보컬의 목이 쉬어 관객들과 떼창을 하며 위기를 모면한 기억도 난다. 그렇게 나는 한층 실력이 업그레이드되어 예과 2학년을 맞이했다. 예과 2학년 봄에 열리는 정기 공연에서 일취월장한 실력 덕분에 실수를 연발하던 내가 가장 많은 곡을 연주하는 인기 멤버가 되기도 했다. 공연을 하는 동아리는 유독 군기가 센 편인데,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 선배들의 채찍질이 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함께 동아리에 들어왔던 8명의 멤버가 모두 한두 번씩 동아리를 탈퇴하고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 혼자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 대가 끊기는 일을 막았던 기억도 난다.

본과에 진학한 뒤로는 학업과 동아리 생활을 병행하기가 어려웠다. 공연 준비를 하다가 재시험을 보기가 일쑤였고 항상 무사 진급을 최우선 목표로 삼을 정도로 성적은 초라했다. 당시에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과목이 신경해부학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자칫 유급을 당할 위기도 있었다. 그런 내가 지금 대학병원에서 신경과 교수로 재직 중인데 당시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요즘 후배들은 자기관리가 철저해서 그런지 다들 좋은 성적에 연주실력도 훌륭하여 감탄을 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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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 생활은 나의 대학생활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었고 본과 3학년까지 십수 회의 정기공연과, 축제 공연, 타 대학 초청공연을 했었다. 대학생활을 빛내게 해준 동아리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첫 월급을 의미 있게 쓰고 싶었다. 처음 받은 인턴 월급 170만원으로 부모님에게 내복을 사드리고 남는 돈에 카드할부를 추가해 250만원이 넘는 야마하 드럼을 동아리에 기증했는데, 아직도 그 드럼을 수리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의료원 신경과 전공의 생활 도중에 매년 열리는 바자회에서 환우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기로 하고 다시 밴드를 조직했다. 스탭 선생님과 전공의 몇 명이 모였고 부족한 파트는 대학교 동아리 후배를 불러 첫 직장인 밴드 공연도 했었다. 병원 앞 공원에서 진행된 콘서트에 삼성역 주변을 지나던 행인들이 많이 몰려 꽤 많은 인파가 공연을 관람했었고, 특히 환자분들이 의사 가운을 입고 공연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박수를 보내주셨다. 전문의가 되면서 드럼 스틱을 내려놓은지 5년이 넘었던 2016년 겨울 갑자기 공연 일정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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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술자리에서 마음 맞는 교수들 몇 명이서 직원 송년회의 교수 장기자랑 시간에 밴드 공연을 해보기로 느닷없이 결정을 하고는 행사 담당자에게 우리 순서를 넣어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병원 지하 구석진 방을 연습실로 개조해 흉부외과, 정형외과, 내과 교수들과 함께 다시 한번 음악의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엉망이었지만 열심히 공연을 준비한 우리들을 위해 직원들이 다 같이 응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두 번째 직장인 밴드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 당시 구매한 전자 드럼을 지금 연구실에 설치해두고 뚝딱거리면서 나름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중이다.

이후로도 지금까지 경희의대 동아리에서 정기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는데 학생 위주로만 공연을 하던 행사가 이제는 졸업한 선배들의 참여가 많아지면서, 학생부터 전공의, 전문의, 교수까지 30년이 넘는 선후배가 가족들과 함께 만나서 공연을 하고 즐기는 행사로 발전하여 많게는 200 여명이 모이는 큰 행사가 되었다.

2019년 가을 공연이 끝날 무렵 서울시 의사회에서 주관하는 자선 록페스티벌에 동아리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입상한 후배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을 비롯하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까지 다양하게 모여 출전을 하였다. 서울시 의사회 회원이 포함된 의사 직장인 밴드의 경연대회였는데, 프로 못지 않은 출중한 실력의 팀들이 대거 참여를 하였고, 3시간의 치열한 본선 경연의 경쟁을 뚫고 3위에 입상해 상금 전액을 환자들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를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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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 불타오르던 열정을 중년의 나이까지도 이어질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바로 음악의 제일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환자들을 돌보면서 느끼는 어려움과 고민, 그리고 스트레스까지도 북소리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드럼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데 참 좋은 소재이다. 인하의대 나정호 교수님의 음악적 열정이 참으로 대단했는데, 마침내 몇몇 후배 교수들을 초빙하여 교수님의 작은 꿈이었던 신경과학회 소속의 의사들로 구성된 밴드를 조직하신 것이다. 가톨릭의대의 김용재 교수님, 동국의대의 김동억 교수님, 서울의대 고상배 교수님, 성균관의대 이미지, 권순욱 교수님이 멤버로 참여해 주셨다. 나정호 교수님의 위트 넘치는 아이디어에 밴드 이름은 Blood Brain Band (BBB)로 정했다. BBB는 2019년 1월에 첫 연습을 시작하여 매월 1회씩 스튜디오를 빌려 연습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코로나 사태 때문에 연습이 중단된 지 벌써 4개월째라 다들 몸이 근질근질할 것이다. 하루빨리 사태가 진정되어 연습을 재개할 수 있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학회를 대표하는 밴드로 자리를 잡고 학술대회 갈라 행사에서 축하 공연을 할 수 있지 않을까? BBB는 참여하고 싶은 학회 회원에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특히 보컬인 고상배 교수님의 연수 기간이어서 객원 보컬의 참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예술적 감성은 우리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일상에 지쳐 있는 선생님들께 나만의 감성적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꼭 추천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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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쥘 드 라 뚜렛(Georges Gilles de la Tourette) 암살 미수 사건 -

  글_박지욱(제주 박지욱 신경과의원)



1893년 12월 6일, 수요일 저녁. 파리 유니벡시떼 가 39번지(39 Rue de l'Université, Paris)의 쥘 드 라 뚜렛의 아파트 겸 개인 진료실에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찾아온다. 뚜렛은 출타 중이었지만 여인은 계속해서 뚜렛을 기다렸고, 15분 후 집으로 돌아온 뚜렛은 진료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와 마주했다.
여인은 그에게 ‘최면술에 관한 책을 지으신 뚜렛 선생님 맞으세요?’라고 물으며, 이미 여러 의사들에게 최면요법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신이 ‘형편이 어려우니 50프랑을 달라’고 말하는 당당함을 보이는데, 뚜렛은 그런 그녀가 당황스러우면서도 최면치료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후, 뚜렛은 어찌 되었건 도움이 될 방법을 알아볼 테니 이름과 주소를 알려 달라고 대답하지만 여인은 막무가내로 그에게 돈을 달라고 우겼다. 찰나였다. 한 성깔 하는 뚜렛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문은 여기요’라는 듯 문 쪽으로 걸어가 그녀에게 등을 보인 순간 총성이 울렸고, 뚜렛은 목에 강한 충격을 느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상황 파악이 안 된 뚜렛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는 두 번째 총성을 들었다.
뚜렛은 방에서 나가려고 안간힘을 썼고, 상처가 난 목을 만져보았다. 빨간 피가 손을 흠뻑 적셔갈 때 그는 손으로 피부 아래와 뼈사이에 총알이 박힌 것을 확인했다.
그 사이 경찰이 달려왔고 검은 옷의 여인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뚜렛은 아주 유명해졌으며, 파리 시민들은 어쩌면 1790년에 이 도시에서 벌어졌던 암살 사건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1793년에 혁명가이자 의사인 마라 (Jean-Paul Marat; 1743~1793) 역시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젊은 여인의 칼에 목숨을 잃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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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년.



경찰 조사에 따르면 범인은 30세로 이름은 로즈 캄페르(Rose Kamper)로 살페트리에(Salpêtrière)병원에 입원했던 사실이 있었다. 살페트리에병원은 뚜렛이 샤르코 아래서 진료와 연구를 했던 곳이다.

36년 전인 1857년에 뚜렛은 프랑스 중서부 지역의 루덩(Loudun)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남다른 아이였다. 자라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감정의 변화가 심했다. 하지만 머리는 비상해서 중학교에서는 월반을 했고, 16세에 푸와티에(Poitiers)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877년에 그는 파리로 왔고, 1881년에는 라엔넥(Laennec) 병원에서 의학 공부를 계속했다. 1884년, 27세의 나이로 그 유명한 살페트리에병원에 인턴(house physician)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샤르코(Jean Martin Charcot; 1825~1893)를 만나게 된다. 샤르코는 뚜렛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그를 애제자로 삼아 그에게 연구 거리를 안겨주었다. 뚜렛의 이름을 의학 교과서에 남긴 ‘투렛 증후군’도 ‘무도병(chorea)을 정리해보라’던 샤르코의 숙제에서 시작되었다. 이후에 뚜렛은 샤르코의 기록 비서(chef de Clinique; specialist registrar)가 되어 샤르코의 모든 진료와 강의를 기록으로 남긴다. 샤르코도 뚜렛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밀어주었다.

샤르코도 그렇지만 뚜렛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파킨슨병이나 다발성경화증 같은 신경학 영역은 물론이고 히스테리나 최면술 같은 정신학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뚜렛은 비상한 머리를 써 다양한 의료 기구도 만들었다. 샤르코가 한때 파킨슨병 환자 치료에 도움을 보았다고 믿었던 진동 의자나 진동 헬멧도 뚜렛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뚜렛은 의학 외에도 연극 평론을 썼고, 자신의 ‘히스테리’ 연구서에는 서양 미술을 가미하였다.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외톨이나 다름이 없었다. 성격은 급하고, 정신은 산만했으며 주변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거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나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관심사 외에는 모든 것을 도외시했고, 걸핏하면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다.
이렇게 이 바닥에서 사람 성질 돋우기로 유명해진 뚜렛에겐 변변한 친구도 없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과 인간관계조차 유지하질 못해 커리어를 키우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그는 운명의 해인 1893년에 들어선다.
1893년에 뚜렛은 36세가 되었다. 출발은 좋았다. 연초에는 심혈을 기울인 ‘히스테리’ 연구서의 2부가 완성되었고,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하지만 7월에는 어린 아들을 뇌막염으로 잃었고, 8월에는 10년 동안 자신을 밀어주던 샤르코마저 세상을 떠났으며, 12월에는 괴한에게 피습을 당한 것이다.

다행히 목에 박혔던 총알은 꺼냈다. 총알은 후두골에 닿기만 했고 더 이상 들어가지는 않았고 목숨을 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사이 범인에 대한 경찰 조사와 법정 공방에서 여러 사실들이 밝혀진다. 여인은 과거에 뚜렛의 환자였다. 여인은 병원에서 의사들이 자신에게 강제로 최면을 걸었고 그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졌음을 느껴 당연스럽게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의사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누군가 자신에게 살인을 하도록 최면을 걸었다고도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당시는 ‘최면과 범죄’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던 때였고, 뚜렛은 최면으로 범죄를 사주할 수 없다는 편에 서있었다.
범인은 정신이상으로 판정받았고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간호사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고, 1910년에는 병원을 탈출했다. 하지만 말년에 피해 망상이 심해져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1955년에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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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렛의 암살 미수 사건을 그린 삽화, 1893년



뚜렛의 삶은 암살 미수 사건 이후에 우울증과 과대망상으로 인하여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말년에는 학구열과 정신 이상이 합세하여 <17미터 높이에서 추락한 뒤에 생기는 히스테리 현상>, <히스테리성 기원으로 생긴 뇌출혈 사례>, <임산부 파상풍의 히스테리적 본질> 같은 이상한 논문들을 발표한다. 이렇듯 그가 가장 애정을 들인 영역은 ‘틱’이 아니라 ‘히스테리’였다.
1900년이 되면서 그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그가 의사 겸 환자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1901년에는 소속 병원에서 무기한 병가를 받았다. 그리고 요양을 위해 스위스로 가족 여행을 떠났고, 스승의 아들이자 의사인 장 밥티스트 샤르코(Jean-Baptiste Charcot)가 동행했다.
루체른의 호텔에서 뚜렛은 식당 메뉴판을 모조리 훔치는가 하면, 고가의 지팡이를 무턱대고 사기도 했다. 더 이상 이 사태를 지켜볼 수 없던 샤르코는 로잔에 있는 유명인이 뚜렛에게 진료받기를 원한다고 그를 꾀어 내었고, 로잔 인근의 세리(Cery)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무사히 뚜렛을 데려간 다음 폐쇄병동에 강제 입원시켰다.
하지만 그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나아질 수 없었다. 뚜렛은 당시에는 치료할 길이 없는 신경 매독에 걸렸기 때문이다. 스승과 함께 정신-신경의학의 넓은 지역을 탐사했던 그는 다양한 신경-정신의학 질병 연합의 공격을 받는다. 광증을 비롯해 치매가 심해졌고, 뇌전증 때문에 경련도 일으켰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904년 5월 22일에 병원에서 그는 숨을 거두었다. 샤르코를 만난 지 20년, 불의의 피습을 당한 지 10년 만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41세였다. 너무 때이른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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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 환자를 두고 강의하는 샤르코. 여인을 붙잡은 이는 바빈스키다. 화면 중앙의 맨 앞줄에 앞치마 하고 앉은 이가 뚜렛이다. <살페트리에병원의 임상 강의>, 18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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