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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병원 소개: 류상효신경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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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 설명: 우리의 뇌 안에, 나무가 있습니다. 사랑의 나무, 감사의 나무, 행복의 나무, 희망의 나무 그리고 생명의 나무가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습니다. Draft는 제가 작성하였으며, 자세한 디자인은 환자로 인연이 된, 미국인 친구인 Randy가 해주었습니다.





1.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현재 부산 대연동에 신경과를 개원한 류상효입니다. 저는 한림대학교 성심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았으며, 전라남도 영광에 있는 공립 영광 노인전문 요양병원에서 초대 원장을 거쳐, 광주 굿모닝병원, 부산 좋은강안병원에서 신경과 주임과장을 지낸 뒤, 마지막으로 해동병원 신경과장 및 응급실장을 역임한 후 현재 부산에서 류상효신경과의원을 운영하며,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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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업을 하신 계기가 있나요?


공중보건 시절부터, 노인요양병원을 거쳐, 수련병원, 종합병원 등에서 근무하였습니다. 봉직의사로서 급성기 환자들이나 중환자실의 중증 환자들을 보던 어떤 날은 과거 전공의 시절 때 보다 더 고되지만, 열심의 자세로 환자들을 보고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스스로에게 슈퍼맨 신드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되는데, 그 당시의 저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바이탈을 다루고, 생과 사의 귀로에 서있는 환자들을 보면서, 정말로 열심히 환자를 진료하였습니다. 그 순간들이 제게는 의사로서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중증환자들을 다루고 치료해야만 의사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하기 어려우나, 그 당시에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과거 어느 날 젊은 만성 편두통 환자를 진료한 적이 있습니다. 38살의 두 아이를 둔 여성이었는데, 저한테 진료를 받고, 약을 먹으면서 많이 호전되어 외래로 올 때마다 언제나 웃음을 지으며 늘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던 분이었습니다. 2년여 동안 두통 예방약 처방과 추적 관찰을 진행하던 어느 날 제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바로 그 만성 편두통 환자의 어머니로부터의 자신의 딸이 뇌출혈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전화였습니다. 연락을 받고 놀란 가슴에 저는 처음 진료했던 기록을 살펴보고, 이전에 촬영한 Brain MRI, MRA를 확인하였으나,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저는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달려가 대기하고 있던 가족들과 면담하고, 중환자실 면회시간에 ICU병실로 들어가 ventilator와 수많은 라인들이 연결된 채로 누워있는 환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환자는 예방약 복용 가운데에도 간헐적 두통이 있었으나, 필요시에는 제가 처방한 약을 추가로 복용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서 갑자기 근무 도중 심한 두통과 함께 쓰러졌다고 하더군요. 지나고 보면, 불가항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환자는 출혈이 심해지는 두통에도 저만 믿으며 약을 복용하며 다음 외래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응급 두통 안내지라도 드리고 좀 더 잘 봐드렸더라면….’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병원에 오라고 더 강력하게 이야기했었더라면…’
‘대학병원으로 가서 고해상도 MRI 및 SWI 영상이라도 해보자고 했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뇌출혈이 발생하기 2주 전 외래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날은 유난히 환자가 많았습니다. 중환자실을 포함한 입원환자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 외래 시간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해서 진료를 봐드릴걸…’
‘그날 입원시켜, 절대 안정을 시켜드리고 무리하지 말라고 할걸…’

이전에 급성 뇌경색 환자에게 정맥내혈전용해술을 시행 후 뇌출혈이 발생했던 일도 기억이 났습니다. 그럴 때면 늘 스스로를 자책하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여하간 저는 이 일을 겪은 뒤 두통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의 치료는 일차진료를 통해 질병의 진행을 막는 것, 더 나아가 예방이 가장 최선의 진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는 진료 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더욱 상세하게 교육 및 상담을 해드리고, 환자분들의 삶과 가정에 개입하여,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료가 ‘병이 진행되어 중증의 상태에서 중환자들을 보는 의료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개원을 통해 좀 더 환자분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두통에 대한 체계적인 상담 및 진료 시스템을 갖추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죠.


3. 개업하시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개원을 준비할 당시에는 봉직의사로서 급성기 환자들을 보는 종합병원에 근무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근무를 하면서 개업을 위한 서류 준비, 대출, 임대, 인테리어, 네트워크, 의료 프로그램, 인력, 세무 및 노무에 대한 것들을 준비하기에는 모든 것들이 많이 복잡하였고, 하나하나 준비해 가면 갈수록 해야 할 일들이 점점 늘어나서 사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개원 시 어려운 점을 논하자면, 혹자는 ‘입지’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겐 ‘선택’이 참으로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인테리어 회사가 좋을지… 인테리어 도면 작업에서 진료실 및 검사실 등의 배치 등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어떤 검사 기계를 들이고 어떻게 운영하면 좋을지… 그리고 어떤 인력들을 어떻게 채용해서, 함께 식구가 되어 의원을 꾸려가는 것이 좋을 지….” 등에 대한 선택과 결정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 말이죠.
입지에 대한 결정에 대해 잠시 언급 드리자면, 그냥 제가 살고 있는 지역 근처로 결정하였습니다^^. 지역이 결정되고 나니, 마침 환자로 인연이 된 어떤 공인 중개소 소장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원하기로 결정한 지역은 제가 마지막 봉직의사로 근무한 종합병원과 거리가 꽤 멀게 위치하고 있어, 이에 간혹 ‘이전에 근무하던 종합병원 근처에서 하는 것이 좋을 텐데.’라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전 종합병원에서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았으며, 새로운 곳에서 더 많은 환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며, 신경과 의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길 원하였기에 망설임 없이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후회가 전혀 없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만남도 중요하지만, 헤어짐도 중요하기에, 그동안 제가 근무했던, 영광의 노인전문요양병원, 굿모닝병원, 좋은강안병원 그리고 해동병원 이사장님들 및 원장님들과 지금도 종종 연락하고 있으며, 그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간직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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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떤 컨셉을 가지고 개업을 하셨나요?


우선 제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가 두통이어서, 이에 대한 전문 의원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보톡스 외에 CGRP 항체주사 등으로 두통 치료에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편두통이나 두통의 진단 및 치료 등에 대해 인식개선에 있어서 많은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적절한 진단도 받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진통제를 자주 복용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엉뚱한 치료를 받다가 저에게 오시는 분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두통 환자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을 이해해 주지 못하여, 가정 및 사회에서 꾀병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쉽지 않게 보게 됩니다. 이에 좀더 두통 환자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생활습관 개선에 대한 교육 및 편두통을 포함한 두통 질환의 인식 개선 등에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 그리고 두통과 동반된, 우울증, 수면장애, 불안장애 등을 다루고자 이에 관련된 공부를 하고, 환자를 보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또 하나의 컨셉은 외국인 환자들 유치입니다. 최근 10여 년간 끊임없는 외국인들의 유입으로 우리나라에는 현재 128만의 외국인 인구가 있습니다. 부울경(부산, 울산, 경남)지역에는 현재 15만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저는 USMLE 합격 후 짧게나마 미국에서의 경험 그리고 광주영어방송(GFN) 및 부산영어방송(BeFM)에서의 경험으로 영어권 환자들과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으로 인해 멀리서 저에게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재한외국인(在韓外國人)들을 보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 듯이 진료에서 있어서도 소통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의 이러한 소통 능력을 통해, 대한민국의 발전된 의료 서비스를 그들에게 베풀 수 있길 바랍니다. 멀리 한국까지 와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언어 및 문화의 장벽이 없는 소통을 통해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에서의 삶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외에, 제가 부산에서 10여 년 가까이 지내면서 알게 된 지역 단체장들과 재가서비스 단체장들과의 인연으로 지역사회 어려운 분들에게 신경과의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있습니다.
“We gather out thoughts, but only God knows the answer”
솔로몬의 잠언에 나온 내용으로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다른 해석들이 있습니다.
“To humans belong the plans of the heart, but from the LORD comes the proper answer of the tongue.” 외에 다양한 versions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저의 해석을 더하자면,
“인간의 삶은 우리 인간이 계획하고 실천하나, 실행되고 향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관여하신다.”입니다.

향후 어떤 환자분들이 오실지, 그리고 병원이 어떻게 변화가 될지는 모르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상상과 기대만으로 저는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5. 병원 소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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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효 신경과 의원은 우선 위치적으로 “부산의 홍대”라고 불리는 경성대학교와 부경대학교를 옆에 두고 있으며, 부산 지하철 2호선 대연역 1번 출구 앞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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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아카데미: 신경과 개원의로 살아가기

글_이일근(서울브레인신경과 원장)


우선, 이 글의 제목에 대한 짧은 생각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애초에 원고 청탁으로 받은 제목은 ‘신경과 개원의로 살아남기'였습니다. 제목을 받아 들고 몇 번 읽어보니, 조금 서글프고 절박한 느낌이 들더군요. 보통 이런 표현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의료 전문과 중에서 신경과는 살아남기 힘든 쪽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 경험과 의견이라서 살짝 제목을 한 글자 바꾸어 보았습니다. ‘신경과 개원의로 살아가기'라는 표현은 조금 부드럽고 긍정적인 느낌이 더 많이 들어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 신경과는 특별한 진료과입니다.


신경과가 여러 전문과목 중에서 특별한 진료과목들 중에 하나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특별하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겠습니다. 우선 다루는 의학 이론과 질병 현상이 복잡하여 다른 진료과 의사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내용이 많습니다. 또한, 전체 개원의 숫자를 비교할 때 신경과 개원의 숫자가 매우 적습니다. 희귀한 진료과인 셈이죠. 이 두 가지 특징이 개원 환경에 장점일까요? 단점일까요? 어떤 분은 장점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고, 다른 분은 단점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 특별한 점이 모두 개원에 큰 도움이 되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신경과 의학 이론과 질병 상황 및 치료가 복잡하여 다른 과에서 진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과에서 환자 방문 처음에는 진료를 시도를 하시겠지만 제대로 된 조언과 진료가 이루어지지 않다 보면 나중에는 환자도 뭔가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하겠다는 느낌이 있어서 결국 환자는 여러 조사를 거쳐서 근처의 신경과를 찾습니다. 예를 들어 흔한 두통 환자를 예로 들어봅시다.

두통 증상을 호소하면 어느 의원에서나 치료를 쉽게 시도할 수 있겠죠. 한데, 현실에서 보면 두통의 형태와 분류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여 진단도 그냥 두통이고, 치료제는 대부분 소염진통제에서 끝납니다. 그러면 일차두통 중에 만족스러운 치료 효과를 내지 못하는 환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고통이 지속되는 환자는 자구책으로 주위 지인에게 자문을 구하고 홍보 매체를 찾아보다가 신경과에서 효과적인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언젠가는 신경과를 방문합니다. 개원의 숫자가 적다는 것은 어떻게 작용할까요? 개원의 숫자가 적으니까 환자들이 잘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요즘과 같은 정보화 세상에 신경과를 모를까요? 당연히 신경과를 찾습니다. 그러니 숫자가 적다는 것은 치열한 경쟁의 필요성이 적다는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제가 신경과 전문의를 취득하던 1992년에는 대부분의 신경과 전문의가 대학교수 또는 봉직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때는 신경과 전문의는 큰 병원에서 근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고, 신경과 개원의는 전국에 몇 분 계셨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30년 흘렀네요. 세상도 바뀌고 의료 환경도 바뀌고 신경과의 위상도 바뀌었습니다. 요즘 의료 현실이 비관적이고 험난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비관적이고 험난하지 않은 전문직이 어디 있나요? 오늘날의 신경과 전문의는 대학교수, 봉직의, 개원의, 어느 곳에서도 가치를 발휘하면서 원하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지역사회에서 신경과 개원의 역할


개원의가 되면 자기 병원 안에서만 진료하면 된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속해 있는 지역사회와 상호 작용, 유기적인 관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고 있으니 당연한 이치이죠. 그렇다면 지역사회 활동을 통해서 나의 신경과의원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지역의사회 활동입니다. 지역의사회 활동은 기본적으로 동료 의사와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의 의미가 가장 큽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주위의 다른 병원 원장님들과 교류 및 진료 협력, 환자 의뢰 채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지역의사회 활동의 종류가 다양하므로, 임원으로서 지역의사회 회무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고, 회원으로서 위원회 활동이나 동호회 활동 등에 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의사들만의 활동도 있고, 주민들과 함께 하는 활동도 있으므로 각자의 성향에 따라 선택하여 참여할 수 있습니다. 대개 많은 개원의들이 관심이 없어서 참여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신경과 개원의는 특유의 희소성으로 인하여 특별한 역할 수행의 장점이 있으므로,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참여의 문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러한 활동은 비용을 들여서 하는 광고보다 훨씬 더 좋은 홍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 개원의로서 성공을 위한 전략의 핵심


애초에 저에게 주어졌던 주제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마도 신경과 개원의가 성공적인 개원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견을 기대하셨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저는 특별한 의료기술과 치료법 등의 일반적인 조언보다는 근본적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환자와의 관계, 보호자와의 관계, 지역 내 타 병의원과의 관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환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계속 다니면서 진료받고 싶은 병원' 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 다니고 싶은 이유는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계속 다니고 싶은 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다른 환자에게도 진료를 권하고 싶은 병원’으로 기억에 남아야 합니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환자와 마찬가지로 ‘내가 계속 다니면서 진료받고 싶은 병원', ‘다른 환자에게도 권하고 싶은 병원’ 이 되어야 합니다. 환자와 보호자는 모두 내 병원의 가장 훌륭한 홍보대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진료하면서 환자와 보호자가 단순 방문자가 아니라 가는 곳마다 우리 병원을 알리고 홍보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지역 내 타 병의원의 원장은 경쟁 상대일 수도 있지만, 내가 하기에 따라서는 나를 도와주는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조력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 병원을 다니던 환자 중에서 신경계 증상, 질병이 있는 환자를 내게 의뢰하게 됩니다. 이런 근본적인 설정이 기본이 된다면 신경과 개원의로서 안정적인 경영과 성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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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fe B;rain


페라리와 뒤시엔느의 공통점은?

  글_박지욱(제주 박지욱 신경과의원)


많은 사람들이 꿈의 차로 꼽는 ‘엔쪼 페라리’를 만든 엔쪼 페라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슬픈 개인사가 있다. 하나밖에 없던 아들이 젊어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들을 앗아간 병은 근이양증이다


엔쪼 페라리와 디노


엔쪼 페라리에겐 결혼 10년 만에 얻은 아들 알프레도 ‘디노’(Alfredo Ferrari; 1932-1956)’가 있었다. 엔쪼는 원래 레이서의 꿈이 있었지만 자신이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이 대신 이루어주길 원했다. 하지만 아들은 몸이 건강하지 못하였고 급기야는 걸음도 어려워졌다. 아들은 뒤시엔느 근이양증(Duchenne muscular dystrophy)을 앓았다.

엔쪼는 디노에게 회사를 물려주기 위한 후계자 수업을 받게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대신 디노는 페라리의 엔진 개발 팀에서 일하게 된다. 그가 개발한 V6엔진은 F2머신을 거쳐 F1머신에도 장착되지만 디노는 그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24세의 나이에, 뒤시엔느 근이양증(Duchenne muscular dystrophy)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뒤시엔느 근이양증은 성염색체성 열성 유전 방식으로 대물림되며 보통 25세 정도 밖에 살지 못하는데 디노가 죽은 나이는 24세였다. 그가 앓은 근이양증이 베커(Becker) 타입이라는 주장도 있다.

엔쪼는 요절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하는 차를 만들어 ‘디노 페라리’로 명명한다. ‘디노’에는 디노가 개발에 참여한 V6엔진이 장착되었다. 또한 엔쪼는 밀라노대학 의학부에 아들의 이름을 딴 디노 페라리 센터 연구소(Centro Dino Ferrari, Università degli Studi di Milano) 설립을 지원했다. 이 곳은 근위축 같은 난치병 연구를 한다.

엔쪼와 아내 로라는 백년해로를 했지만 로라가 죽은 후 엔쪼의 혼외 자식인 피에로(Piero Ferrari)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피에로는 현재 페라리의 부회장이며 당연히 근이양증에는 걸리지 않았다.


귀욤 뒤시엔느


귀욤 뒤시엔느(Guillaume-Benjamin-Amand Duchenne (de Boulogne);1806~1875)은 1806년에 프랑스의 북서부, 영국 해협에 면한 불로뉴-쉬르-메르(Boulogne-sur-Mer)에서 태어났다. 19세에 대학을 졸업한 후 파리로 가 파리에서 라엔넥(René-Théophile-Hyacinthe Laënnec)과 뒤피트렝(Guillaume Dupuytren) 같은 유명한 의사들 문하에서 의술을 배웠다.

파리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그는 아버지가 죽은 후 귀향하여 개업하고 결혼하여 아들도 얻었지만 아내는 산욕열로 목숨을 잃었고, 아들은 처가에 빼앗기고 만다. 그 후 고향 땅에서도 정착하지 못하여 5년 만에 파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파리에서도 번듯한 직장을 구하진 못하고 임시직, 비정규직을 전전한다. 정식 의사도 아니어서 주변의 멸시도 받았지만 언제나 연구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전기신경학과 근육병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지난한 그의 삶도 이제 해피엔딩이 되는 것 같았다. 어려서 생이별을 했던, 처가에 빼앗겼던 아들을 다시 만난 것이다. 아들은 의사 더구나, 자신처럼 신경과 의사로 나타나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장티푸스는 아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뒤시엔느는 심한 우울증의 나락으로 떨어져 재기하지 못하였고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하지만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아직 움직여지는 손으로 자신의 마비 진행 사항을 기록으로 남겼다.

살아서는 무시당하고 인정받지도 못하는 떠돌이 의사였지만 그의 이름은 근육병에도 전기생리학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파리 살페트리에 병원에는 그를 기념하는 흉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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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뒤시엔느와 전기생리학 실험 사진. 위키백과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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