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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 의사의 취미생활


당구에 대하여
글_김주한(한양대병원 신경과)


당구를 주제로 한 영화는 드물지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86년작, ‘Color of Money’는 9 ball pocket ball을 주제로 한 대표적인 영화이며, (1961년의 영화 ‘Hustler’에 이어 Hustler II 라고 불린다. Hustler I에도 폴 뉴먼이 주연이다) 폴 뉴먼, 톰 크루즈, 메리 엘리자베스 마스트란토니오를 만날 수 있다.

‘Color of Money’는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당구에 걸고 싸워 나가는 남성들의 세계가 많은 상징과 비유 아래 전개되며, 이 시대 최고의 영화감독 Martin Scorsese의 치밀한 구성과 당구장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인간드라마를 절묘하게 포착해 낸 스콜세스 이미지의 남성미학이다. '파란 사각 융단의 승부사'(전설적인 승부사 故이상천선수의 자조적인 표현인 ‘작대기’, 사진 참조)의 세계를 중후하고 선이 분명한 힘의 터치로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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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he Hustler(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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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Color of Money(1986, Hustler II)

24살의 젊고 풋풋한 탐 크루즈, 묘한 매력의 28살 메리 엘리자베스 마스트란토니오, 61살 폴 뉴먼의 중후한 연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로 폴 뉴먼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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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뉴먼과 톰 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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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상천선수(1954-2004)

[당구의 역사]

당구는 B.C 400년경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현대식 당구는 영국에서 14세기경에 성행하던 크리켓 경기를 실내에서 할 수 있도록 개량한 것과 프랑스에서 16세기경 왕실 예술가 A. 비니가 고안한 것을 시초로 본다. 초기에는 당구대도 커다란 평판이었고 큐도 굽은 막대 또는 금속 막대였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공끼리 맞게 하여 점수를 헤아렸으나, 특히 영국의 경우 당구대 위에 아치 모양의 문을 만들어 두거나 양 끝에 구멍을 만들어 그 속에 공을 맞혀 넣는 포켓 게임이 행해졌다.

그 후 큐도 똑바른 나무 막대기로 바뀌는가 하면, 1818년에는 영국의 자크칼에 의하여 공의 미끄럼을 방지하는 회분(초크)을 큐 끝에 바르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1837년 당구대 가장자리에 고무 쿠션을 달아 탄력을 주는 등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8년 아시아 경기대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 프랑스 정부가 지정하는 개최국 추가 종목으로 당구가 도전하고 있다. 당구는 1980년대부터 IOC한테 지속적인 로비를 해 왔으나 다른 스포츠 단체들의 힘에 밀려서 그동안 올림픽 종목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당구의 인기가 전 세계적인 만큼 예전부터 당구의 올림픽 진입 논의는 지속적으로 있어 왔는데, 파리 올림픽 때 추가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우리나라의 당구

한국에는 구한말 때 처음 들어왔다.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망국 이후 당구를 상당히 즐겨서 창덕궁에 일본에서 주문해서 만든 옥돌로 만든 포켓 당구대 2개를 두고 하루에 2시간씩 당구를 쳤다고 한다. 어용 옥돌대의 시설을 관리하고 순종에게 개인적으로 당구를 가르쳤다던 전상운 씨에 따르면 순종은 지금의 4구 150-200점의 실력이었다고 한다. 태생인 유럽에서부터 황제들이 즐긴 어용 스포츠였던 당구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을 하게 되면서 일본에 의해 들어온 것으로 본다. 일본은 이보다 20여 년 전인 1850년에 네덜란드로부터 당구가 전해져서 왕실과 귀족사회의 사교 놀이로 시작하여 대중적인 스포츠로 서서히 자리 잡고 있었다. 창덕궁에 있던 옥돌대 두 대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순종이 국권을 잃은 그날부터 마지막 승하하는 순간까지 그를 위로했다. 아쉽게도 현재는 원형이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인정전 동행각에 남아 있는 고독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슴 아린 온기가 후대에 깊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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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황제의 마지막 취미... 비운했던 한국 당구사를 재조명한다 (Billiards)



[당구의 종류]

당구경기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1. 포켓 당구(Pocket billiards, Pool): 테이블 가장자리에 있는 6개의 포켓에 목적구를 집어넣는 당구

2. 캐럼 당구(Carom billiards): 포켓 없이 한 번의 샷으로 큐볼(수구)이 여러 개의 목적구를 맞히는 당구(캐럼볼은 크게 사용되는 공의 수에 따라 3구, 4구 경기로 나뉘며, 초기에는 4구 경기를 즐겼으나 최근에는 3구 경기가 대세이고 국내 및 세계대회에서도 대부분 3구 3쿠션 경기로 진행된다.)

3. 스누커(Snooker): 21개의 공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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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누커

스누커(Snooker)는 19세기 후반에 인도에서 시작된 당구의 경기 방식이다. 당대에 많은 인기를 얻었던 종목인 Life Pool 과 Pyramid Pool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Snooker’란 당구에서 다른 플레이어가 목표 공을 노리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대부분의 상황에서 장애물로 인하여 깨끗한 궤도를 확보하기 어려운 본 게임에 적절한 이름이다. 6개의 포켓이 있는 당구대에서 경기하므로 넓게 봐서는 포켓 당구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만, 당구대의 크기, 사용하는 공의 수, 경기 규칙 등이 완전히 다른 경기이다. 캐럼 방식이 지배적인 한국에서는 이런 종목이 있나 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전용 당구대를 갖춘 곳도 찾기 어려운 편이지만, 아시안 게임에 채택될 정도로 애회에서는 인기 있는 종목이다. 영국을 포함한 영연방, 중국 등지에서 인기가 높으며 A급 선수들은 전 국민이 익히 알 정도의 스타로 인정받는다. 또한, 프로 리크의 선수층과 상금 규모 역시 당구 종목 중에서는 최대이다.

■ 캐럼볼(Carom billiard/Billiard français)

유럽 대륙과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당구이다. 국내에서 주로 치는 4구와 3쿠션이 바로 캐럼 당구로 구멍(포켓)이 없는 당구대에서 2개이상의 적구를 연속해서 맞히는 경기 방식이다.

1) 4구경기
한국에서는 주로 공 4개를 가지고 하는 4구를 많이 하지만 4구는 한국이나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다. 위키피디아에서도 Sagu, Yotsudama라고 설명되어 있을 정도이다. 2개의 적구를 모두 맞히되 상대방의 수구를 맞히면 안 된다. 참고로 한국, 일본에서 사용되는 4구용 당구대는 대회용 당구대보다 작고, 4구용 당구공은 3구용 당구공보다 크기 때문에, 초보자들이 좀 더 쉽게 경기를 할 수 있다. 특히 당구 실력이 높은 수준에 올라서면 공을 모아 놓고 쿠션을 따라 돌아가며 몰아치기(보통‘세리’라고 부르는 기술)로 다득점하는 것이 가능해서 대회 수준에서 4구 종목을 채택하는 경우는 드물다.
2) 3구 경기
-3구 원쿠션: 2개의 적구 중 마지막 적구를 터치하기 전에 수구를 1회 이상 당구대 쿠션에 닿게 해야 득점이 인정되는 경기 방식으로 아시안게임에서 채택되었다.
-3구 쓰리쿠션: 2개의 적구 중 마지막 적구를 터치하기 전에 수구를 3회 이상 당구대 쿠션에 닿게 해야 득점이 인정되는 경기 방식으로 프로 경기에서 쉽게 볼 수 있다.

■ 예술당구

특정한 형태로 공과 장애물을 배치한 뒤, 주어진 조건에 따라 묘기와 같은 미션을 완료하는 형태의 경기로 Artistic billiards 또는 trickshot이라고 부른다. 예술당구도 크게 나누면 캐럼 당구대에서 하는 경기와 포켓 당구대에서 하는 경기로 구분된다.

1) Artistic billiards
캐럼 당구대에서 3구만을 보통 사용하며 미리 배치된 공을 주어진 조건에 맞춰 쳐내는 방식이다. 보통 3쿠션 시합에서 나올만한 난구 상황이 문제로 제시되며 반드시 주어진 조건에 맞춰 공을 쳐내야 한다. 예를 들면 3개의 공을 코너에 몰아넣고, 마세(큐를 수직으로 또는 수직에 가깝게 세워서 공을 내리찍어 치는 기술)를 이용하여 해당 코너에서만 3쿠션을 완성한 뒤 적구를 맞히도록 하거나 마세를 이용하여 한쪽 벽면에서 3쿠션을 모두 완성하는 방법 등이 있다.
2) Artistic pools 또는 trickshot
포켓 당구대에서도 할 수 있는 경기로, 이 경우에는 공의 수가 많기에 좀 더 다양한 조합이 만들어진다. 또한, 공 이외의 장애물도 많이 사용하며, 심지어 사람까지도 장애물로 이용한다. 이 경기에서 나오는 유명한 문제로 butterfly shot이라는 것이 있는데, 당구대 중앙에 6개의 공을 잘 배치하고 단 한 번의 샷으로 6개의 공을 서로 다른 6개의 포켓에 동시에 집어넣는 것이다.

■ 당구명언

“패자는 카운터로”: 이 얼마나 심금을 저리는 한 마디 인가...

“당구병법”: 과히 병법이라 칭하기에 손색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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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1972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여 1974년 서울의대 본과 진학, 1978년 서울대학교병원 인턴, 1979년-1983년 서울대학교병원 신경과 전공의, 전문의 취득 1983년-1986년 병역 마친 후 1986년 5월부터 2019년 2월까지 한양대학교병원 신경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2019년 2월 정년퇴임 후 현재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로 근무 중이다.



 2. 많은 분들이 교수님을 강호의 당구 고수라고 합니다. 당구를 시작하신 계기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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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는 아니고 신경과 회원 중에 정말 쟁쟁한 고수가 여러분(4구 경기 기준 김xx, 1,000점, 장xx 700점 등) 있는데 저는 예전 당구(4구)로 250까지 쳤다.

국민학교(당시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어 입시 경쟁이 대단했었다), 중·고등학교 12년 동안을 공부에만 시달리다 보니 많은 대학생들이 보통 대학교에 진학하면 공부에 대한 해방감에 친구들과 어울려 대학가 주변에 흔하게 있던 당구장에서 당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의예과 시절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즐기며 수업 중간중간 비는 시간, 또는 수업이 끝난 후 동기들과 파란 당구대와 갖가지 색깔의 당구공, 초크를 칠하고 큐대로 칠 때의 명쾌한 소리, 기하학적 상상력을 끌어내어 3쿠션을 쳤을 때의 쾌감을 맛보기 위해 당구장으로 향하곤 하였다.

당구에 한참 빠졌을 때는 누워서도 천장을 당구대로 낮의 경기를 autopsy 하기도 하곤 했는데, 만원 버스를 타면 다른 사람들 머리를 쳐다보고 그 머리들로 당구를 친다는 친구도 있었다. 당구를 잘 칠수록 정상적인 학생, 건실한 사회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1960년대엔 4구 당구지수가 300점이 넘으면 ‘집 한 채 바쳤다’고 했으며 1970년대에는 4구 당구 200점이 되려면 소 한 마리 값을 투자해야 된다고 했다.



 3. 기억이 남는 당구시합이 있으신지요?


의예과 시절에는 시험이 끝나면 학교 앞 당구장에서 짜장면 시켜 가면서 낮부터 밤늦도록 즐겼던 기억이 난다. 당시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어서 12시 전에 아쉬운 마음으로 귀가하였다.
기억에 남는 당구 시합으로는 친구들과의 복식경기에서 뒤지던 경기를 10개 몰아치기와 3쿠션 2개, 가락(뱅크샷) 1개를 한 번에 성공하여 역전승했던 적이 있다.


  4.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일 잘 치셨을 때 몇 정도 치셨는지, 본인이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으셨는지요?^^


제일 잘 쳤을 때 예전 4구로 250 정도였고, 제일 기억에 남는 경기는 10여 년 전에 신경과 의사들과 편을 짜서 4구 복식 경기를 하면서 한 번에 24개를 친 적이 있다.

  5. 많은 사람들이 취미로 당구를 칩니다. 입문자를 위해 당구 고수로서 용어 또는 여러 지도 부탁드립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 당구 붐이 일면서 당구 전문 채널이 생기고, 국내 대회뿐 아니라 세계대회(대부분 3쿠션)도 자주 열리고 있다. 덕분에 세계적인 선수들, 쿠드롱, 브롬달, 야스퍼스, 산체스, 먹스, 세이기너 등, 우리나라 선수로는 故이상천, 故김경률, 최성원, 강동궁, 조재호, 허정한, 김행직, 조명우 등을 TV에서 자주 볼 수 있고 일반인의 예상을 벗어나는 현란한 기술을 보는 것이 동호인으로서 큰 낙이다. 저녁때 TV프로가 마땅한 것이 없으면 당구 채널로 돌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남자 3쿠션 국제 경기는 얼마 전까지 40점 단판 경기를 했는데 얼마 전부터 서바이벌 경기(4명이 경기하여 상위 2명이 남고 2명은 탈락하는 경기), 15점 5세트 경기 등 새로운 경기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국제 경기도 많이 열리고 게다가 상금도 많아서 해외 유명 선수들이 많이 출전하고 있으며 인기도 좋다. 4구가 3쿠션만큼 인기는 없으나, 4구 동호인들 사이에 신으로 간주되는 우리나라의 이기범 선수의 실력은 다른 4구 선수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구에 회자되는 대표적인 경기로, 경기 시작과 동시에 첫 이닝(소위 한큐)에 단번에 521점을 치면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진기한 기록을 세웠다. 첫 이닝 521점 치는 사이 허락된 경기 시간 40분이 모두 소요되며 경기 종료, 최고 점수 521점, 그리고 이닝 당(큐당) 평균 점수도 역시 521점으로 동등한 진기한 기록 등...

한국의 당구는 일본으로부터 유래되었기에, 일본식 표현이 아주 흔하게 사용되었다. 아래 표를 보면 알겠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된 일본어가 아니라 대부분 와전된 표현이다. 최근에는 방송 등에서 이런 용어를 순우리말이나 하다못해 영어로라도 순화하여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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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랜드 애버리지(Grand Average): 총득점을 총이닝 수로 나눈 것, 즉 1이닝 평균득점률.
* 마세(Masse): 큐를 세워서 찍듯이 공을 내려 맞히는 경기.
* 뱅킹(Banking): 선공(先攻)을 결정하기 위하여 공을 치는 일.
* 프로즌(Frozen): 자기 공이 다른 공이나 쿠션에 밀착해 있는 것.
* 하이런 (High Run): 1이닝에서 최고로 기록한 연속 득점.



 6.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당구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첫째, 두뇌 경기이다. 기하학적, 물리학적 머리와 상상력을 동원하고 능력을 발휘하여 연타치기를 시도하고 자기가 성공하기 힘든 경우 수비를 강화하여 상대방에게 어렵게 공을 배치하려고 한다. 상대방 선수는 이런 의도를 극복하고 성공을 노리고 연타를 도모한다.

둘째, 신사적인 경기이다. 축구, 농구, 야구 등은 상대방 선수들과 신체적으로 끊임없이 부딪쳐서 비신사적인 행동이 문제되는 측면이 많은데 이에 비해 네트를 이용하는 경기, 예를 들어 테니스, 탁구, 세팍타크로처럼 상대와 신체적으로 부닥치지 않는 점이 좋다. 전에는 나비 넥타이를 매고 깔끔한 옷차림으로 경기했는데 시대상을 반영해서인지 요새 자유로운 옷차림으로 경기하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셋째, 비용이 적게 든다. 몇 명이서 경기를 하더라도 1시간에 10,000-15,000원 정도면 충분하다. 1990년경 한양대학교 근처에 당구장이 우후죽순처럼 늘었고 경쟁적으로 게임비를 낮추어 10분에 300원, 1시간에 2,000원을 받아 당구장들이 출혈 경쟁을 했던 적도 있다. 저녁시간에 시내의 직장인들이 몰려 들어 북적북적 댔었다. 일부 당구장에서 낮 시간에 1인당 1만원을 내면 시간 제한없이 즐기는 경우도 있다.

넷째, 높은 체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인도 젊은이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 요사이 당구 인구가 많이 늘고 있는 것도 50-60대 이후 예전에는 등산을 많이 했는데 등산은 무릎 등 관절이 부실하거나 체력이 부담스러운 경우 당구를 즐기게 된다. 고교별 당구동호회가 많이 생겨 정기적으로 즐기는 경향이다.

다섯째, 자투리 시간을 알차게 이용할 수 있다. 4구 경기 기준으로 2명이서 1 경기를 하는데 대강 20-30분 소요되니까 약속시간을 맞추는데 효율적이다.

여섯째, 음주 운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저녁, 술을 하고 난 후 그냥 헤어지기 아쉬운 경우 또는 술을 깨기 위해 이용할 수 있다. 술 마신 후 당구치는 경우 자신 또는 동료가 얼마나 술에 취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일곱째, 점심, 또는 저녁 때 당구를 즐기며 식사 및 dessert도 해결할 수 있다. 주로 짜장면을 먹는다.

그렇다면, 유독 당구장에서 먹는 짜장면이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에 대해 요리전문가 방송인 백종원이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백종원에 따르면 당구장에서는 짜장면을 비벼 놓고 먹으려고 보면 자신이 공을 칠 차례가 돌아오게 되는데 공을 몇 분 정도 치고 돌아오면 면에 소스가 다 배서 짜장면이 맛있다고 나름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또한 중국집에서 먹는 짜장면보다 집으로 배달시켜 먹는 짜장면이 살짝 불어서 더 맛있다는 팁도 알려 주었다.


 7. 신경과학회에 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1983년 대한신경과학회가 창립된 후 그 동안 많은 발전을 하였고 정회원수도 2,000명에 달하는 상황이다. 학술적인 면 뿐 아니라 수련, 교육, 간행, 대국민홍보 등 여러 측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고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성인병과 치매, 파킨슨병 등 퇴행성질환 등 신경과 관련 질환 빈도가 늘었고 신경과의사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국민들의 신경과에 대한 홍보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리고 신경과에 대한 전공의의 지원과 인기가 전보다 못한 점은 장단기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공의 과정을 끝내고 사회에 진출했을 때 전문의가 배운 대로 자신의 의료 기술을 소신껏 발휘할 수 있도록 보험수가의 현실화 등 학회의 정책적인 노력이 한층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 대한당구연맹 http://www.kbfsports.or.kr/front/main/main.do
2. 빌리어즈 http://www.thebilliards.kr/
3. 나무위키 당구 페이지 https://namu.wiki/w/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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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싱 이야기
글_박지욱(제주 박지욱신경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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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 쿠싱. 위키백과 자료.



■ 쿠싱의 생애


하비 쿠싱(Harvey Williams Cushing; 1869~1939)는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까지 4대가 의사였다. 예일대학교에서 물리화학을 공부한 후 하버드 의대에 진학했다. 1895년에 졸업한 후 매사추세츠종합병원(MGH)에서 인턴을 마치고, 존스홉킨스병원(JHH; 1889년 설립)의 외과 전공의에 지원해 미국 외과학의 아버지인 할스테드(William Stewart Halsted)의 제자가 된다. 1900년에 외과 전공의 과정을 마쳤고 1년 동안 유럽에 ‘수학(修學)여행’을 간다. 당시 미국의 의사들은 의학 선진국인 유럽에 가서 당대의 석학들에게 배우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이 과정을 통해 유럽의 의학 기술, 제도, 문물이 미국으로 도입되었다.
쿠싱은 리버풀에서 신경학자 셰링턴을, 베른에서 외과의사 코허를 만났는데 특히 뇌 손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코허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귀국 후(1902년) JHH의 외과에서 일하면서 사실상 신경외과 수술을 도맡게 되었다. 이렇게 미국 신경외과학이 탄생한다.
1911년에는 JHH를 떠나 보스턴의 피터 벤트 브링검병원(BWH)의 수석 외과 의사로 옮겼고, 이듬 해에는 하버드 의대의 외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 프랑스 전선에 군의관으로 활약하며 4개월 만에 219건의 뇌수술을 했다.
1931년에 뇌종양 수술 2,000건을 달성했고, 이듬해인 1932년에 30년 신경외과 의사의 여정을 마무리한다(63세). 은퇴 후에는 모교인 예일대학교 신경과의 ‘스털링’ 석좌교수(Sterling Professor of Neurology: 1933-1937)와 의학사연구소장(Director of Studies in the History of Medicine (1937-1939)이 되었다. 7년 동안 예일대학교에서 독서, 강의, 집필로 여생을 보내다가 1939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70세).
그의 삶을 요약하는 키워드로 뇌수술, 뇌하수체, 아이디어맨, 르네상스맨, 의학사, 폭군을 꼽아보았다.



■ 미국 신경외과의 아버지


JHH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할스테드가 미국 외과학의 역사를 열었다면, 같은 병원에서 쿠싱은 미국 신경외과학의 역사를 시작했다. 유럽 여행 중 코허를 만나 ‘뇌 손상과 동반된 뇌압의 변화와 혈액 순환’ 관련 동물 실험을 했고, 이 연구를 통해 이른바 ‘쿠싱 반사(Cushing reflex)’를 확립한다. 쿠싱 반사란, 뇌압이 오르면 혈압이 오르고, 호흡이 불규칙해지며, 맥박수가 떨어지는 현상이다. 이는 뇌압 상승 → 뇌혈류 감소 → 연수의 혈관운용센터(vasomotor ceneter) 자극 → 전신 혈압 상승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CT/MRI 같은 영상 장비로 뇌손상 환자의 뇌 속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뇌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쿠싱 반사 현상을 이해한다면 뇌 손상 환자의 혈압 상승은 뇌압 상승을 반증하는 지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 신경내분비학의 개척자


쿠싱은 JHH 시절인 1909년에 말단비대증 환자를 대상으로 뇌하수체(pituitary gland) 수술을 했다. 당시 신경외과의사들은 뇌하수체 바로 아래를 지나가는 시신경(optic tract)을 건드릴 위험 때문에 뇌하수체 수술을 극도로 기피했다. 하지만 쿠싱은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뇌하수체의 일부를 과감히 잘라냈다(수술 결과는 일시적인 호전이었다).
당시에는 뇌하수체의 기능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지금 아는 시상하부-뇌하수체-말단 내분비선의 체계가 발견된 40년이나 더 후의 일이었다.
쿠싱은 뇌하수체의 기능을 알아보기 위해 실험동물의 뇌하수체를 제거하고, 이를 다른 동물에게도 먹여보았다. 심지어는 사람→사람 뇌하수체 이식수술도 시도했다(모두 아무 효과가 없었다).
뇌하수체는 쿠싱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쿠싱은 성장에 뇌하수체가 관여한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그래서 난장이, 거인 심지어는 아주 특이한 외모를 지닌 사람들의 뇌하수체를 빼내어(물론 그 들이 죽은 후에) 연구했다. 이러한 끈질긴 연구는 『뇌하수체와 질병(The Pituitary Body and its Disorders, 1912년)』로 출판되었다. 그가 직접 찍은 섬뜩한 사진들로도 유명해진다.
1932년에는 뇌하수체 종양 연구를 발표한다. 뇌하수체의 일부세포가 과잉 성장하면서 만든 종양(basophile pituitary adenoma)를 발견했고, 뇌하수체 종양이 인체의 여러 내분비선을 자극하여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론인 ‘다분비샘증후군(polyglandular syndrome)’을 발표한다. 우리는 뇌하수체에서 만들어진 과잉의 부신피질자극호르몬(ACTH)때문에 생기는 부신피질기능항진증을 ‘쿠싱병(Cushing’s disease)’으로 부른다(ACTH는 1933년에 발견되니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이처럼 쿠싱은 비밀스러운 뇌하수체를 재발견했고, 내분비기관의 위상을 주었다. 쿠싱이 보기에 뇌하수체는 내분비기관의 말단 연락소가 아니라 내분비기능의 핵심이자 중추였다. 그래서 그는 뇌하수체를 ‘내분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the conductor of the endocrine orchestra)’로 불렀다. 이렇게 쿠싱은 신경내분비학(neuro-endocrinology)의 개척자가 된다.
수년 전 대한내분비학회는 매년 4월 8일을 ‘쿠싱병의 날’로 정했다. 쿠싱이 1869년 4월 8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올해가 쿠싱 탄생 150주년 해다.



■ 혁신가


한마디로 쿠싱은 혁신가다. 선각자다. 아이디어맨이다. 1895년에 X-선이 발견되었고, 1896년에 그가 인턴으로 일하던 MGH에서 X-선이임상에 도입되는데 참여했다. 이 경험을 살려 JHH X-선 촬영실을 만들었다.
유럽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면서는 이탈리아에서 막 개발된 혈압계를 미국에 처음으로 들여왔으며 수술 중 혈압 측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울러 마취 중의 혈압, 맥박, 호흡수를 기록하는 차트를 만들었다.
JHH 외과 교수로 일하면서 전공의 교육을 위한 동물 실험실을 세웠다(1905년). 전공의들을 사람을 수술하기 전에 동물의 몸을 수술해 수술법을 충분히 익히게 했다.
그는 매우 섬세한 신경외과의사였다. 조심스러운 칼질과 지혈로 수술 후 사망률을 엄청나게 낮추었다(60% → 10%). 보비(Bovie)를 수술장에 들여와 지혈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1926년).



■ 르네상스맨


운동, 음악, 미술, 사진,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대학 대표 야구 선수, 수준급 피아노 연주, 수술 장면 스케치, 교과서에 실은 사진, …이것도 모자라서 그는 정신적인 아버지였던 JHH의 내과/신경과 의사 오슬러(William Osler)에 관한 전기를 써 퓰리처상까지 받았다(1925년).
은퇴 후 예일대학교에서 의학사 연구와 희귀고서를 수집하는데 열의를 바쳤고, 이 모두가 예일대학교에 기증되었다. 이것이 의학사 도서관(Medical Historical Library)을 거쳐 예일대 의학도서관(Harvey Cushing and John Hay Whitney Medical Library)으로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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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학교 의학 도서관((Harvey Cushing and John Hay Whitney Medical Library). 위키백과 자료.



우리가 단순히 ‘쿠싱 반사’와 ‘쿠싱병’에 붙은 인명(eponym)으로만 기억하는 하비 쿠싱, 앞으로는 신경외과와 신경내분비학의 개척자는 물론이고 의학계의 르네상스맨으로도 꼭 기억하길 바란다. 아울러 우리 신경과 회원이라면 기회가 되면 예일대 의학도서관(Harvey Cushing and John Hay Whitney Medical Library)에 있는 쿠싱센터(Cushing Center)도 찾아가 그가 평생 모은 방대한 뇌 컬렉션도 꼭 보시길 바란다. 앞으로도 한 사람으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참고문헌**
1. 크레이지 호르몬(AROUSED by Randi Hutter Epstein, 2018) /랜디 허터 엡스타인 지음/양병찬 옮김/동녘사이언스/2019
2. 뇌과학자들(The tale of the dueling neurosurgeons by Sam Kean, 2014) /샘 킨 지음/이충호 옮김/해나무/2017
3. 메스를 잡다(under the knife by Arnold van de Laar; Onder Het Mes, 2014)/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제효영 옮김/을유문화사/2018
4. Neurological Eponyms/edited by Peter J Koehler, George W Bruyn, John MS Pearce/Oxford University Press/2000
5. Harvey Cushing and the Cushing Center(https://library.medicine.yale.edu/cushingcenter/history)
6. BWH Milestones(https://www.brighamandwomens.org/about-bwh/bwh-milestones)
7. Wiki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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