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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 개원의 수필: 류상효 원장 [part 2]


  글_류상효(류상효신경과의원 원장)




내가 개업을 하게된 이유

부산에 정착한 지도 어느덧 4년이 흘러, 나는 마흔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꺼지지 않는 경조증적(hypomanic) 열정을 불태우며 환자들을 보던 어느 날 아침, 회진을 돌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찔한 느낌과 함께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며 병동 복도에서 넘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피곤해서 그런 것이겠지…'라며 시간을 두고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순간의 휘청거림과 술에 취한 듯한 현기증이 점점 더 자주 발생하기 시작했다.
신경과 전문의로서 어지럼증을 떠올리자 여러 가지 감별 진단이 머릿속에 스쳐 갔다. 그래서 나는 혈액 검사, 뇌자기공명영상(MRI) 촬영, 그리고 기타 유전자 검사 등을 해보았지만, 모두 음성이었다. 결국 만성 수면 부족과 피로로 인한 것으로 간주하고 휴가를 신청한 후 가족과 함께 잠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휴가 동안 맛있는 것도 먹고, 잠도 잘 자고, 즐겁게 지내는 중에도 여전히 휘청거림과 아찔함이 수시로 찾아왔다.

때마침 학창시절 단짝이었던, 現)대한정신건강의학회 특임이사인 정찬승 원장으로부터 안부 전화가 걸려왔다.

“찬승아 나 일본이야. 휴가 중…… 그런데…… 어쩌고저쩌고…… 어지러운 증상이 있어.” 이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 그래? 그럼 한번 정신건강 진료 보고, 항우울증 치료제 하나 먹어 봐봐. 나도 환자 보다가 너무 정신적으로 피곤해서 그런 적이 있었는데, 외래 환자 줄이고, 좀 쉬니까 좋아졌어. 항우울증 치료제가 사실은 우울증 외에도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고 이 약을 먹는 동료 선생님들도 많아. 이제는 우리 나이에 정신건강도 신경 좀 써야 돼”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정신건강 상담 후 행복호르몬으로 알려진 세로토닌 재 흡수 억제제를 복용하면서, 외래 환자 수를 줄이고, 입원환자들을 3차 기관으로 전원 시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비특이적은 현훈증 및 기타 어지럼증의 증상들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에 나는 스스로 “심인성 현훈증”이라고 진단했다.
그동안 '심인성 현훈증'으로 진단된 환자들에게 "정신과나 가보세요!"라고 차가운 어조로 말하며 그들을 무시하고, '나약한 인간들'이라며 비판했던 나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그런 교만한 내 자신을 반성하며 신께 용서를 구해본다.
하지만 이러한 반성과 뉘우침이 불완전했는지, 여전히 심인성 질환을 앓는 환자들을 볼 때면 가슴 속에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던 중, 어느 날부터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피로와 관절통, 그리고 1년 내내 지속되는 통증이 심한 아프타성 구강궤양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내 몸은 육체적으로 지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지쳐갔고, 결국 비특이적인 염증 수치 상승과 원인 모를 고열로 인해 입원하게 되었다. 나는 류마티스 내과와 소화기 내과의 협진을 받은 후, HLA-B51 양성과 다발성 궤양이 나타난 위장 및 대장내시경 소견을 접하게 되었다.


지천명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 홀로 응급실 당직을 서며(내가 근무하는 동안 신경과 환자의 급증과 과로로 제2의 신경과로 확장을 하게 되었다), 급성 뇌경색 환자들, 중첩성 뇌전증 환자, 일본 뇌염 환자, 세균성 뇌막염 환자 등을 보았다. 중환자실에서 수시로 연락을 받고, 즉시 달려가 문제를 해결했으며, 이로 인해 내 수면과 삶의 질이 병들어 나의 뇌세포와 신체를 파괴하였다. 그렇게 나는 만성 수면 박탈과 피로를 동반하며 다시 외래 진료를 이어갔다.
머리가 멍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학창 시절 재시험을 준비하며 의학관과 도서관을 오갔던 그 때의 좀비처럼 느껴진다. 전신 관절통과 위장 장애로 인해 복용하는 약이 점점 늘어나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실감난다.
어느 날 부산청년정책 연구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들과 책을 읽고 나누며, 전문가로서의 조언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정한 책이 하나 있는데 이를 읽고 전문가로서 청년들의 독서 모임을 이끌어 달라는 것이었다

책의 제목은 『잃어버린 치유의 본질에 대해서』였다.
저자는 ‘버나드 라운 박사’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심장내과 전문의로서 생전에 심장 제세동기를 발명하고 리도카인의 원리를 규명하는 등의 심장내과 분야에서 큰 획을 그은 분이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의사와 환자를 사이를 신뢰로 묶어주던 전통이 이제는 새로운 관계로 대체되었다. 치유는 처치로 대체되고, 치료 대신 관리가 중요해졌으며,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던 의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의료장비가 대신한다. 이런 관계에서 고통 받는 인간으로서의 환자라는 존재는 잊힌다.”

과학의 발달과 함께 최첨단 의료 장비를 통해 의사와 환자들이 별다른 대화 없이 빠르게 질병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환자들이 다양한 비특이적인 신경학적 증상으로 괴로워하며 신경과나 기타 병/의원들을 찾아간다. 그들의 절박함 때문인지, 아니면 기존 의학에 대한 신뢰를 잃어서인지, 나는 그들이 검증되지 않은 주술적인 치료에 현혹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내가 무시하고 한심하다고 여겼던 많은 환자들에 대한 생각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들의 반응이 나를 힘들게 하고, 때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그들의 우매함에 실망하며 그들을 정죄하는 마음이 생긴다. 한편으로는 나의 수동적 공격성이 발동해 그들의 고통을 더 간과하고, 더 힘들게 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리고 그런 환자들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내가 경험한 심인성 현훈증을 통해 나로 인해 한심하게 여겨지고 무시되었던 환자들의 모습이 결국 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괴롭다.
한때, 변화 무쌍한 증상들로 신경과 및 여러 정신과를 방문했던 환자들이 나에게 내원하기도 했다. 지치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과 상당 기간 동안 면담과 교육, 진료를 진행하면서 그들의 증상이 호전되고 극복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의학적으로는 인지행동치료라고 하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는 신경 회로의 재배치 또는 보정이 아닐까 싶다.
신경과 의사들에게는 내과 및 다른 진료과에서 해결하지 못한 환자들이 내원한다. 그 가운데는 다양한 신경증(Neurosis) 환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들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심인성 현훈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 또한 이러한 증상을 경험한 바 있다. 그 동안 나는 그러한 환자들에게 별다른 대화나 진찰 없이 검사 결과와 기계적인 해석 및 답변만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고통을 간과해온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그런 환자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또한 그들과 함께 늙어 가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계획이 내 생각 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들과 좀 더 가까이에서, 일상을 함께 하며, 일차 주치의로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으로 개원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개업 과정

우리 집에는 사용하지 말아야 할 단어들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어차피"라는 말이 그런 단어들 중 하나다. 가족 중 누군가 "어차피"라는 단어를 말하면, 벌칙을 받는다. 그 이유는 "어차피"라는 말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임의로 한정하고, 향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이나 미래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스스로 제한을 두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금지어’로 종종 언급되는 단어는 "망했다"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어차피"와 마찬가지로,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이미 실패와 좌절의 길을 선택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보드 게임 중에는 "쿼리도"라는 것이 있다. 체스나 바둑과 비슷한 계열의 추상 전략 게임으로, 여러 가지 변수가 게임 막판까지 작용한다. 즉,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게임이다.
개원을 앞두고 어느 날, 나는 아들과 함께 이 "쿼리도" 게임을 했다. 아빠를 닮아 눈이 크고 눈물이 많은 아들이 게임 중간에 울먹이며 말했다. "망했다."
아들의 풀이 죽은 모습과 큰 눈에 고인 눈물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하면 아들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 "현민아, 이 세상에서 망한 것은 없어.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과정에서 배움과 자신의 발전이 있다면, 어떤 실패도 망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배움의 기회가 되는 거야."


말을 하고 나니, 결국 이 말이 나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반 고등학교 재학 시절, 60여 명이 넘는 학급에서 어느 과목 하나도 시험 성적이 30등 안에 들어본 적이 없는 내가, 6번의 학력고사에 응시하고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학창 시절에는 매 학기마다 빠짐없이 치러진 수많은 재시험들로 낭만적인 대학 시절의 방학을 보냈다.
그런 내가 공중보건의 시절에 "미국 의사고시를 공부하면, 합격 여부를 떠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또 한 번 주어진 배움의 기회를 잡아 시험에 도전했다.

이제는 개원이다.
‘개원’이야말로 나에게 또 다른 배움을 주는 인생의 기회로 여겨진다. 개원 소식을 알리자, 여기저기서 수많은 조언과 이야기가 들려왔다.
"장비는 어떻게 할 건지, 위치가 중요한데…" "직원들 관리가 힘들 텐데…" "코로나로 힘든데, 지금 이 시기에…" "인테리어는 어떻게 할 건지…"
누구나 인생은 처음 살아보는 것이다. 개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개업뿐만 아니라, 모든 삶에서 어려움은 피할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신념이 있다.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나에게 가장 큰 보람이자, 진정한 성공이 아닐까.'

류상효 신경과 의원은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인 2021년 4월 1일에 개원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처음에 들었던 조언들과 이야기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원장님, 너무 이상주의 아니세요?"
"원장님, 이렇게 오래 환자들을 보니까 환자 수가 이것밖에 안 되는데, 어찌 장사가 되겠어요?"
"장사…" 정말로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개원을 앞두고 사업자 등록을 마치던 날, 내 핸드폰으로 수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류상효 원장님 되시죠? 구글 홍보팀인데요. 사업자 등록을 하셨는데, 다음을 따라 주셔야 구글에 등록할 수 있어요…"
"안녕하세요, 류상효 원장님 되시죠? 저 어디 어디 포털인데요. 사업자 등록을 하셨는데, 네이버/다음 지도에 등록을 하시려면…"
"안녕하세요, 류상효 원장님 되시죠? 중소기업지원센터인데요…"
확인해 보니, 위의 모든 전화들이 소위 피싱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늑대 소굴 속에 살아가는 양떼와 같다고 한다.
모두가 먹고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나도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는 희망을 키워본다.
내 삶의 목표가 세상에서 부러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소망과 힘을 주는 것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원의로서의 시작은 한편으로는 걱정과 두려움을 가져다주지만, 설렘의 파도가 큰 해일을 만들어 저 멀리서부터 나에게 다가온다.


 


류상효신경과의원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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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이라는 말에 임신이 떠오른다. 실제로 이 단어의 라틴어 어원에는 임신이라는 뜻도 있고, 의학적인 용어에서도 많이 사용된다. 임신을 위한 교배가 이루어지고, 수정이 되면서 성별이 결정되며, 뱃속에서 자라다가 유산이 되기도 하고, 출산을 통해 아이가 태어나 자라면서 수많은 희로애락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경험조차 하지 못하기도 한다.
어느덧 부산에 온 지 10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 나는 수련병원을 포함해 두 개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했다. 류상효 신경과는 부산 남구 대연동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내가 과거에 근무했던 두 병원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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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치를 선택한 이유는 과거에 근무한 병원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 병원들과 연계하여 개원가에서 할 수 없는 뇌 영상 검사(MRI, PET 등)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개인 병원의 원장이다. 즉, 1차 의료기관의 전문의로서 "예방이 최선의 치료"라는 1500년 전 지독한 이상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다.

나의 개원 컨셉은 이렇게 잉태되어 세상에 태어났다.
"사람의 길은 인간이 계획하나, 운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다윗의 아들인 지혜의 왕 솔로몬이 말했다. 태어난 아이가 자라면서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듯이, 류상효 신경과 의원도 주변의 환자군에 따라 자신만의 색깔을 갖춰가고 있는 듯하다.
부산 대연역을 중심으로, 앞뒤 지하철 역 구간 사이에 10개가 넘는 정신건강의학과가 있다. 그로 인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신경과적 질환이 동반되거나 감별이 필요한 환자들이 내원한다. 동반된 내과적 질환들도 다양하다. 매일매일이 다이나믹한 외래 진료의 연속이다.
이렇듯 지금의 다채롭고 개성 있는 일차 진료기관으로서의 독창적인 컨셉을 그려낼 수 있음은 내가 신경과 수련을 받은 덕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전공의 시절, 나는 환자가 될 리 없다는 교만과 부정 속에 있던 인생의 걸음마 시기를 지나, 나 자신도 유한한 존재이며 환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내가 근무하는 지역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희망과 소망의 삶을 꿈꾼다.

신경증(neurosis)이라는 용어는 1769년 스코틀랜드의 의사 윌리엄 콜렌(William Cullen)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 그는 신경증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신경증은 우리의 감각과 운동신경의 이상이며, 이는 우리 신경계의 이상으로 발생한다."
(Neurosis is a disorder of sense and motion caused by a general affection of the nervous system.)


윌리엄 콜렌이 설명한 신경증에 대한 기술은 현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최신 뇌영상 및 연구들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용어를 처음 임상에 적용한 트라우마의 대가 닥터 베셀 반 데어 콜크(Bessel van der Kolk)는 그의 저서 『몸은 기억한다 (The Body Keeps the Score)』에서 신경증 및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신체적 증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 불안, 신체화 증상, 그리고 기타 심인성 질환들은 모두 신경 회로의 이상에 기인한다. 이러한 신경 회로는 우주와 같은 끝없는 세계 속에서, 인간만이 듣고 볼 수 있는 유한한 감각을 통해 무한한 것들을 해석하는 임의적인 시스템이다. 또한, 나를 포함한 많은 신경증 환자들의 취약성(vulnerability)과 회복력(resiliency)에는 태아 시절부터 아동기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베셀 반 데어 콜크의 연구 결과는 나에게 걸음마 단계의 의사에서 성숙한 성인 의사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초진 환자의 문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아동기 트라우마에 대한 파악과 이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과거와 현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주변 가족들과의 협력을 통해 "치료가 아닌" "끊임없는 교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진이 함께 "교집합"을 만들어야 한다. 그 교집합이 어느 정도 커졌을 때,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무수히 많은 신경증 증상들은 환자 개개인의 잘못이나 어리석음이 아니라, 과거의 아픈 기억들에 기인하며, 이러한 상처 깊은 기억들은 우주와 같은 신경 회로 속에서 원하지 않는 신경 회로의 프로그램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악성 프로그램들은 개인적, 역사적, 사회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며, 신경 회로의 활동이 멈출 때까지 주변 회로들을 괴롭히고, 그 소유자의 미래와 삶을 파괴한다.

신경과 의사로서 내 역할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한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역사적인 관점에서 형성된 악성 프로그램을 교정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임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발견한다. 비록 수많은 악성 프로그램을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온갖 더러움으로 오염된 강물 속에 맑은 물 한 방울이라도 정화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냄새 나고 역겨운 세상 속에서 찰나의 순간 오염되는 한 방울의 맑은 물이 된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맑은 물이 존재함을 오염된 강물에 보여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멋진 인생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류상효신경과의원

류상효 신경과 의원은 2021년 4월 1일 만우절에 개원하였으며, 현재 원장 외에 총 5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부산 남구 대연역 1번 출구에서 약 10미터 거리에 위치한 2층 건물에 자리 잡고 있다. 대연역 전후로 경성대역과 못골역이 있으며, 이 세 지하철 역 사이에는 약 15개의 정신건강의학과가 위치하고 있다. 신경과 전문 진료 외에도 내과 진료 및 정신건강 진료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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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스스로 순환기질(Cyclothymia)를 진단한, 오지랖이 넣은 원장의 특성상, 인슐린을 이용한 당뇨 치료, 초음파를 이용한 통증치료 및 보톡스 시술 등을 하며, 현재 부산영어방송 BeFM (www.befm.or.kr) “닥터류의 아재영어” 코너를 진행하고 있으며, 혼자 만의 B급 영상을 만들어 유튜버로서 활동을 있다.



▶ 교육채널 인터뷰 영상 보러가기alt


나는 개원한 후 주변인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원장님처럼 태평하게 개업 준비하고, 마음 편해 보이는 분은 처음 봅니다.”

끝으로, 나를 인도하고 앞으로도 이끌어 주실 친구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추가로 류상효 원장이 태평하게 환자를 진료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내조해주는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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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상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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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빙과」 새로운 외침(column)
한 소시민이 의료대란을 바라보며




근거 없는 일방적인 의대증원으로 시작된 의료대란은 응급실 체계부터 붕괴시키기 시작하여 5천만 국민의 목숨을 위태롭게 흔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총선을 앞두고 의대증원 2000명이란 터무니없는 정책을 던진 후 반대여론 차단을 위해 51분에 걸친 담화문을 기자 질문 없이 발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근거자료의 부재와 의결절차의 불공정함이 들어나도 관료들은 부끄럽다는 인식조차 없이 뻔뻔하기만 하다. 정책발표 당시 모든 언론들이 의사들을 악마화하면서 정부에 곡학아세하였다. 30대 의사의 연봉이 3~4억원이라는 김모씨의 선동과 의사라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배아픔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유 없는 적대감을 쏟아냈다. 현실을 자각한 전공의들이 사직이탈하면서 의료현장은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대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며 의대교육도 모두 멈춰 버렸다. 이에 따라 내년도 전문의와 신규의사 배출은 불가능해졌다. 모든 의료교육 양성체계가 대통령의 잘못된 정책 하나로 붕괴된 것이다.

8월 29일 국정브리핑에서 보여준 윤대통령의 상황인식능력은 일반인의 상식을 뒤엎었고 달나라에 사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어느 정도는 건전한 판단력을 갖추었으리라는 일말의 나이브한 미련이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예로부터 독일 군대는 지휘관을 머리가 좋고 게으른 자, 머리가 좋고 부지런한 자, 머리가 나쁘고 게으른 자, 머리가 나쁘고 부지런한 자의 순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상황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지휘관이 부대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면 그 부대는 엉망이 되고 필히 전투에서 패배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S대 법대를 졸업하였다 하니 머리가 나쁘다고 할 수 없을 뿐더러 독일 군대의 지휘관 분류에 직접적으로 대입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품성적으로 격정과 격노가 일상이며 병적인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란 전언을 고려한다면 머리 나쁘고 부지런한 자보다 더 비관적이다.

정교한 후속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급기야 응급실 등 의료체계 전반이 붕괴하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분명한 농단이다. 시작이 잘못된 정책은 그 끝을 가보지 않아도 결말이 명확하다. 향후 10년 내에 뇌, 심장, 폐, 혈관 등 주요 중증 수술을 할 수 있는 한국인 의사는 사라진다 한다. 정부는 이 무서운 미래를 감추고 상급중증병원이니, 필수의료·지역의료 살리기니 하며 여전히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박수치며 의사들을 욕해 왔던 자들과 어용 언론들이 이제서야 현실파악이 되는 듯 어리둥절해 하며 머뭇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지 오래다. 국민교육헌장이나 외우던 86세대가 철 지난 사고(思考)를 가지고 21세기 대한민국에 꼰대질하며 청년들의 앞날을 망치고 있다. 제발 시퍼런 민방위복을 벗어던지고 그만 물러나라. 천벌이 내릴 진져!

마지막으로 의사들에게도 한마디를 남기고 싶다. 공부만 하고 진료만 보던 의사들은 대동단결이라는 가치에는 무관심하다. 개개인의 우수함과 모래알처럼 잘남은 오히려 정부나 공격자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먹잇감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일천한 경험으로 몇 가지를 제안한다면 ① 준법 투쟁의 방식을 정확히 알고 실천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② 여론은 생존의 최우선 고려요소이다. 언론과 국민 그리고 정치인들에게 의사들의 입장을 찾아가 설득할 수 있는 전담기구, 제도, 자금력 등을 구축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시기일지라도 꾸준한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③ 장기적으로 국회의원 출마, 권리당원 가입 등을 통해 정치세력화를 추구하고 의료계를 외곽에서 도울 수 있는 로비집단을 형성해 놓아야 한다.

위태롭고 엄혹한 시기이다. 언젠가는 의료대란을 잘 견디어낸 국민들과 의사가 깊은 유대와 관용속에서 따뜻한 대한민국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길 희망해 본다.


<2024. 9. 4, 전공의 아들을 응원하는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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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전해연」 신경과 전문의 해외 연수기
-부산대병원 김지영 교수편-


  글_김지영(부산대병원 신경과)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지만, 조금은 다르다.


안녕하세요? 부산대학교병원 신경과에 근무하는 김지영입니다. 해외 연수를 마치고 다시 병원에서 근무하며, 일상에 적응하려던 찰나에 해외 연수기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1년간의 소중한 기억이 날아가 버리기 전에 저와 저희 가족이 보냈던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연수기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새로운 경험을 했지만, 부모로서, 연구자로서의 경험을 가볍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아울러 거대한 땅덩이를 가진 나라에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만 짧은 기간 경험해 보고 작성한 글입니다. 이 글 하나로 연수 생활과 미국이라는 곳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1년간의 연수 생활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대표적인 대도시인 Los Angeles에 캠퍼스가 있는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USC)의 Mark and Mary Stevens Neuroimaging and Informatics Institute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USC health science campus에 위치한 연구소입니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대도시인 LA는 말 그대로 인종의 용광로답게 많은 아시아인, 히스패닉, 흑인, 백인 등이 있었고, 특히 제가 살던 곳은 아시아인과 히스패닉 비율이 높았으며, 서비스 업종의 많은 부분을 히스패닉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한식당, 중식당의 요리사도 히스패닉인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듯 자녀가 있는 가족이라면 미국 연수 생활의 많은 부분이 아이의 방과 후 활동을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아이가 축구를 좋아하여 시청 혹은 운동 클럽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했습니다. 그중 인상적인 것은 시청에서 이루어지는 운동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자원봉사자에 의해 운영되어 가격도 저렴하고, 프로그램의 질도 높았습니다. 자원봉사자 코치와 그의 가족들은 매주 3회, 매번 2시간 이상을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프로그램은 체계적인 축구 기술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아이들을 격려해 주었고, 잘하는 아이, 못하는 아이 모두에게 경기에 출전할 기회를 고르게 주었습니다. 가족 전체가 자원봉사로 참여하며 아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격려와 낙오하는 아이가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에서, 경제적 이득이 전혀 없는 저런 일을 왜 하는지 저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에도 도입했으면 하는 문화이기도 했습니다. 저희 가족은 아이가 캘리포니아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로젤로 코치와 그의 가족들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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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에서 운영하는 축구 프로그램에서 팀간 시합이 이루어지는 축구장이다.
잔디 상태는 훌륭하고, 이러한 공원은 차로 10-15분 거리마다 한 개씩 있었다. 많은 잔디 구장은 부러웠다.




아이가 운동하는 두 시간 동안 다른 아이의 부모들과 자연스럽게 '스몰톡'이라고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최근 널리 퍼진 K-컬처 때문인지 많은 학부모가 우리나라에 호감을 보였고, 저도 잘 모르는 K-팝과 드라마에 대해 저에게 이야기해주기도 했습니다. 교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학부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이의 학업에 대한 이야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경우 학부모는 아이가 공부 혹은 운동을 잘하기를 기대한다면, 제가 연수지에 있던 곳의 부모들 중 일부는 아이가 공부와 운동, 혹은 악기를 잘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하면 자유롭고 다양한 형태의 교육 방식을 떠올리지만, 제가 만난 일부 학부모는 한국식 집중 교육을 부러워하며 이곳에서도 그런 교육을 제공하는 곳이 있다면 좋겠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타이거 맘 형태의 교육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높은 학업 성취와 사회적 성공을 바라는 마음은 만국 공통의 현상인 것 같습니다.

연수의 원래 목적인 연구실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제가 연수 갔던 곳의 연구 책임자는 한국 분이었습니다. 연구실 연구원은 주로 한국과 중국 연구원이었고, 박사 후 과정, 대학원생, 연구실 경험이 필요한 고등학생, 대학생 등 다양한 배경과 위치의 인원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연구소가 그러하겠지만, 제가 있던 곳도 연구의 큰 그림은 연구실 책임자가 그리고, 세부적인 진행은 연구원들의 역량에 따라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연구 관련 회의는 2주마다 회의실에 모이거나 온라인으로 진행했는데, 이곳 역시 연구원들은 이 시간을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연구원들이 연구 회의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만국 공통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연구 진행에 난관이 있을 때, 누군가가 답을 던져주는 대신 좋은 해결책에 접근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질문과 대답, 토의 과정을 거쳐 최선의 해결책에 접근하려는 모습은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풍부하고 훌륭한 인적 자원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결과물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연구소 생활 적응에 많은 도움을 주고, 제 질문에 매번 성실하게 대답해주신 연구실 책임자인 김호성 교수님, 소중한 연구원 분들 및 연구소 가족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1년간의 남부 캘리포니아 생활은 여러분의 도움 덕분에 즐거웠고, 제 일과 관련된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게 되었습니다. 함께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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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SC health Sciences Campus는 USC main campus와는 7마일 정도 떨어져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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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소가 있던 USC health Sciences Campus에 위치한 Stevens Hall 이며, 넓은 땅을 가진 나라답게 많은 건물들을 높게 짓지 않았다.
조금 과장 하자면 연수 생활 중 자주 사용했던 건물 중 거의 유일하게 엘리베이터가 있던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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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들어보세요, 레온 플라이셔의 <투 핸즈>


  글_박지욱(제주 박지욱신경과의원)




레온 플라이셔(Leon Fleisher; 1928~2020)는 미국의 피아니스트다. 네 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곧 신동의 반열에 올랐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미국을 대표하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특히 브람스와 베토벤 작품 해석에 탁월한 피아니스트로 알려졌다.
하지만 연주자로서 한창이던 나이 36세(1963년)에 플라이셔는 오른손에 문제가 생겼다. 피아노를 연주하려고만 하면 오른손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이 뒤틀렸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고 무시하려 했지만,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의사들에게 찾아갔지만, 진료실에서는 멀쩡했기에(피아노가 없으니까) 의사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플라이셔가 걸린 병은 국소성 근긴장이상(focal dystonia)이었다.
할 수 없이 왼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곡들, 이를테면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같은 음악을 연주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결국 연주를 포기했다. 불의의 질병으로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온 플라이셔는 하는 수 없이 지휘를 하거나 제자를 키우는 일에 전념했다.
한편으로는 효과가 있다는 치료법은 다 써보았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 1991년에 유사한 사례를 치료했던 의사에게 보툴리눔독소(BTX) 주사 치료를 받았다. 국소성 근긴장이상에 대한 BTX 주사법은 1970년대에 알려졌고, 1990년대에 이르면 주름 제거제로 널리 사용되던 때였다. 다행히 주사 치료는 효과가 있어 플라이셔의 손가락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증상이 점차 나아졌다.
2004년부터는 양손 연주를 다시 시작했는데, 증상이 발현된 지 거의 40년 만의 일이었다. 2004년에 재기를 기념하는 음반 <Two Hands>가 나왔고, 그의 사연을 소개하는 단편 다큐멘터리 <Two Hands: The Leon Fleisher Story>도 공개되었다.
그의 연주는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서 "Leon Fleisher Two Hands"로 검색하면 볼 수 있다. 플라이셔가 학생들에게 피아노 교습을 하는 장면은 <Leon Fleisher: Lessons of a Master (a film)>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유심히 보면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친다.
재기한 후 시카고 대학에서 양손으로 공개 연주를 하는 장면은 <Art Speaks: "Two Hands" by Nathaniel Kahn Q&A with Leon Fleisher>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음악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혹은 운동장애(movement disorder) 전문가들이라면 기억해둘 만한 이야기다.



Leon Fleisher: Lessons of a Master (a film) 영상

▶ Leon Fleisher: Lessons of a Master (a film) 영상 보러가기alt

 

Art Speaks: "Two Hands" by Nathaniel Kahn Q&A with Leon Fleisher 영상

▶ Art Speaks: "Two Hands" by Nathaniel Kahn Q&A with Leon Fleisher 영상 보러가기alt



** 참고문헌 **
1. 뮤지코필리아/올리버 색스 지음/장호연 옮김/김종성 감수/알마/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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