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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을지대병원 초대병원장 윤병우 교수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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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9일의 모 음식점에서 서울대병원을 정년 퇴임하시고 의정부 을지대병원 초대병원장으로 취임하시는 윤병우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회원소통위원회에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대병원 정근화, 고상배 교수가 함께하였습니다.


Q: 얼마전 정년기념 뇌졸중임상연구센터 심포지엄을 통해 정년인사는 하셨지만 신경과학회 회원들께 정년을 맞이하신 소감을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A: 일단 무사히 정년을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의대 졸업하고 40년이 됐어요. 이제 돌이켜 보면 많은 일이 있었지요. 무엇보다도 연구원들은 물론이고, 학회나 다른 동문들에게도 다 감사드리고, 그 이외에 제가 도움을 많이 받은 모든 분들께 ‘고맙습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Q: 원래 심장내과를 마치고 내과 전문의로서 앞날이 보장된 분으로서 다시 신경과를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A: 원래부터 저는 신경과를 하려고 했어요. 학생 때는 정신과를 좋아했는데, 약간의 로망이 있었다고 할까? 그래서 본과 4학년 때 일렉티브 코스로 정신과를 했어요. 4주 동안. 그 때 정신과 조두영 교수님께 배우고자 했지요. 심지어 그 당시 대구에서 열렸던 정신과학회 참석까지 해봤어요. 그런데 일렉티브를 4주 동안 하고 나니 정신과라는 분야 자체는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평생 이 환자들과 마주 보면서 사는 것에는 자신이 없더군요.

고민하다가 그래도 뇌에 관련된, 신경과를 하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인턴을 마칠 즈음 당시 신경과 과장이셨던 명호진 선생님께 가서, “신경과를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몹시 좋아하시더군요. 그런데 그때는 신경과가 독립된 과가 아니어서 정신과에서 킴스티오를 따와야 되는데 김주한 선생님 이후에는 전무후무했어요. 내가 지원할 때 킴스티오가 안 나와서, 명선생님께 가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쭈어봤더니, 세 가지를 추천해 주시더군요. 하나는 정신과로 우선 가서, “나는 신경과를 주로 할 테니까, 신경과를 좀 더 많이 하게 해달라”고 하는 방법인데, 곁불을 쬐는 거 같아서 아닌 것 같더군요. 두 번째는 군대를 갔다 와서 신경과를 하는 방법. 이것은 아버지께서 군대에 먼저 가면 머리가 비어버린다고 반대하시더군요. 세 번째는, 내과를 하고 군대를 갔다가, 그러고 나서 신경과를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세 번째를 선택하기로 하고 내과를 하게 되었습니다.

명선생님께 “내과를 하기로 했습니다. 무슨 전공을 하는 게 좋겠습니까?” 물었더니, “그럼 두 가지 중 하나다. 내분비나 심장내과 중 하나를 해라.”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cardiology를 하게 됐어요. cardiology를 하고 신경과에서 뇌졸중을 하게 된 것이지요. 내과 전문의로 군대에 갔는데, 3년차 때 내가 진짜 신경과를 다시 할 것이냐 가지고 고민을 좀 했어요. 군대에서 아이 둘을 낳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 여러 가지로 힘들더군요. 결정에는 두 번의 허락이 필요했어요. 하나는 제 아내한테 나를 좀 기다려달라, 괜찮겠느냐 물었더니, 하고 싶으면 하라고 그러더군요. 우리 장인이 대학에서 연구를 많이 하셔서 주말에도 집을 비우는 일에 익숙해 있던 아내가 많이 이해해 주었죠. 그런데 내가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어오고 그러니까, “어이구, 이럴 줄 알았으면…” 하더군요. 두 번째는 아버지께 경제적으로 자립할 때까지 지원 해줄 수 있으신지 여쭙고 허락을 받았어요. 그래서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레지던트 두 번 하는 건 참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때도 레지던트 두 번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군대 갔다 와서 신경과를 하는데 내과 전문의라 2년차로 들어가 그렇게 5년 동안 2개 과를 한 것이 되었지요. 그런 전례가 없었을 때 내가 내과를 끝내고 신경과 레지던트 하니까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저놈이 왜 멀쩡하게 내과를 잘하고 나서 신경과로 들어갔지?”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때 신경과는 요새 같은 신경과가 아니었죠. 정말 아주 왜소한 과였거든. 레지던트를 시작하면서 2년차로 시작했는데 병실 주치의는 6개월을 했어요. 사실은 호기롭게 병실 주치의로 시작을 했는데, 6개월쯤 되니까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이 되더군요. 군대 가기 전 내과 레지던트 처음 시작할 때 하고는 차이가 그렇게 나더군요(하하).



Q: 신경과 내부적으로는 심장의 문제, 특히 뇌졸중 환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치료가 가능하게 되었겠네요?


A: 그래요, 그건 맞는 얘기 같아요. 사실 세브란스 신경과는 내과에서 나왔고, 서울대는 정신과에서 갈라졌는데, 그건 장단점이 있죠. 뇌졸중 환자는 내과 질병을 다 갖고 있으니까, 상당히 도움이 됐고, 내과를 마치고나니 환자 상태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어요. 타과 컨설트를 할 때, 내과에는 뭐를 물어봐야 될지 딱 찔러줄 수 있었고, 거꾸로 내과에서도 나한테 컨설트를 많이 했어요, 아무래도 자기들이 궁금한 거에 대해 답을 달아준다 이거지요. 두루뭉술하게 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 서로 도움이 많이 됐어요.


Q: 처음에 정신과, 신경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고위뇌기능에 관한 관심일 텐데, 선생님 앞에서 죄송하지만, stroke은 신경과 중에서도 제일 힘들고 험한 분야 아닙니까?


A: 그런 면이 있지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중환자 보는 게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시작한 거죠(하하)


Q: 오랜 시간 임상가로서 다양한 환자들을 치료해 오셨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A: 당시 우리 병원 약제 부장 아버지가 basilar artery thrombosis로 응급실에 실려 왔어요. 완전혼수상태로 왔는데 intraarterial thrombolysis를 해서 다 뚫어서 회복되어 결국 걸어나가셨지요. 그래서 그분이 계속 건강하게 내 외래로 다녔는데, 다 좋아지니까 이 양반이 막무가내로 미국에 있는 자기 자식한테 갔다 오면 안 되겠느냐고 떼를 쓰더군요. 근데 거기 가서 뭔 일을 당할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서 그 분 배우자인 할머니하고 나하고 할아버지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지요.

또 다른 환자는 고시촌에서 공부하다 혼수상태에 빠진 젊은 여자예요. 사진도 찍어보고 다른 검사를 다 했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야. 회진 돌 때마다 고민했었지요. 부모도 너무 정성으로 간호를 해주는데, 애가 똘똘한 애였던 거 같아요. 지금은 잘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 막 얘기 나오고 있던 자가면역성뇌염의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 초음파검사를 해봤더니 난소에 tumor가 딱 있는 거예요. 산부인과 교수 보고 “수술 좀 해달라” 했더니 “아니,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를 어떻게 수술을 하냐고” 그래서 설득설득해서 수술을 했어요. 그랬더니 애가 깨어나기 시작하는 거야. 결국 완전히 회복되었어요. 그 이후엔 가끔 나한테 외래진료를 오고. 그렇게 하다가 “그럼 이제 더 이상 안 와도 되겠다” 했어요. 그렇게 몇 년 지났는데 외래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순간 불안했는데, 청첩장을 내밀더군요. “저 결혼해요.”라고.


Q: 진짜 보람을 느낀, 그런 환자였겠습니다. 완전히 회복되어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해 주신 거군요. 많은 제자를 길러내신 선생님께 기억에 남는 제자로 누굴 꼽으실 수 있을까요? 아주 멍청해서 기억에 남는 제자라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A: 아니, 우리 교실에서 나온 제자들은 전부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라서, 누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하긴 쉽진 않아요. 다만, 아주 특이한 제자가 있었어요. 대학원 학생 중에요.


Q: 그럼 신경과 레지던트는 하지 않은 제자이겠군요?


A: 팔레스타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 이력이 아주 특이해요. 평양에서 의사 면허를 받았어요. 그때는 팔레스타인하고 북한하고 굉장히 가까웠거든. 북한 의사 면허를 받고 팔레스타인에 돌아가서 봉사를 하다 보니 조금 모자랐다고 생각했는지, 중국으로 들어가서 침술을 배우는 대학을 들어갔어요. 거기서 침술을 배우러 온 한국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한 거야. 그래서 한국으로 들어온 거죠. 당시 왕규창 선생님이 학장 할 때인데, 이러이러한 사람이 뇌졸중에 공부를 하고 싶어 한다, 받아줄 수가 있느냐, 그래서 나도 그러자고 했지요. 근데 아무리 한국 여자와 산다 해도 한국말 구사력에 한계가 있잖아요. 더군다나 임상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한국 면허도 아니라. 그래서 대학원으로 들어왔어요. 대학원에 지원할 때 제출한 성적표를 보는데 거기 과목에 총검술과 주체사상이 있더군요(하하). 결국 동물실험을 해가지고 석사학위 받았어요. 그러던 중 이라크 전쟁이 터졌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군인들이 이라크 파병 가기 전에 아랍 말을 배우고 가야 하니까, 이 친구가 아르바이트 겸 해서 그 일을 하게 된 거야. 아랍말이 모국어이고 한국말도 하는 그런 사람 구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비교적 대우가 괜찮았던 모양이야. 그래서 잘 지내다가 보건산업진흥원을 들어갔어요. 보건산업진흥원에서 아랍 환자 유치도 하고, 우리 병원에서 아랍 환자들 입원하면 와서 봐주고, 마지막에는 아랍의 어떤 대사관에 취업 하고, 한국으로 귀화 했어요. 만약 시나리오 작가를 만날 기회가 있으면, 정말 영화를 하나 만들어도 될 거 같은 스토리지요.


Q: 그럼 교수로서 학생들과 전공의를 가르치는 생활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을까요, 선생님?


A: 가르치는 일은 다른 분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그것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의사 파업입니다.


Q: 아, 2000년도에 있었던 의사 파업이요.


A: 그래요. 20년 전 당시에 제가 병원의 전공의 담당 교수였어요. 첫 번째 병원 보직이었지요. 전임자였던 내과 한성구 교수가 전공의 담당 교수라는 것이 전공의 뽑을 때만 좀 바쁜 ‘한철 장사’라는 꼬임에 빠져 맡게 되었는데, 의사 파업이 시작되니까 ‘온철 장사’가 되었던 거지요. 그 때 참 바빴어요. 전공의협의회 간부들과 밀당하면서 술도 많이 늘었지요.


Q: 신생 을지대 의정부병원장으로서, 앞으로의 포부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이 동네가 의료 취약 지구예요. 경기도로 보면, 남쪽에는 병원이 워낙 많고, 경기도 북서쪽에는 일산에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북동쪽에는 병원이 거의 없습니다. 의정부성모병원이 유일하죠. 그 지역의 주민들이 의료 서비스에 대해 굉장히 목말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신축된 을지대병원은 거의 1,000 베드 되는데, 주민들이 언제 병원이 열리나 하고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는 병원이 되어야겠다, 그것이 제일 먼저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시스템을 갖춰야 되니까 준비를 많이 하고 있어요.

거기에 더해 새로 오는 교수들이 중견이나 젊은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인턴, 레지던트도 없다는 걸 알고 온 사람들이기에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이런 분위기만 잘 이끌어 가면 될 거 같아요. 우선 병원을 연착륙시키는 게 먼저고, 그 다음은 대학병원다운 병원, 즉 연구 활동을 진작시키려고 해요. 새로 뽑은 사람들 이력서를 살펴보면, 연구 논문을 꽤 잘 해놓은 사람이 많아요. 면접 때 “연구를 하고 싶은데 그런 환경이 되겠느냐”고 물어보는 신임 교수들을 보며 저는 낙관적으로 생각해요.

그리고 직원들 상당수가 의정부 인근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자기 지역에 큰 병원이 생기고, 자기는 그 병원에서 근무한다는 자부심이 있으니까 잘 될 것 같아요.


Q: 신경과 전공의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A: 제가 지난번에 번역한 책의 서문에도 있지만, 검사만 보는 의사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제발 환자를 열심히 보는 의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걸 검사가 도와주고 있지만, 검사만 쫓아 가다 보면 굉장히 잘못된 일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검사 결과가 환자의 임상 양상과 얼마나 연관이 되어있는지 생각하면서 가야 하는데, 점점 그런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졌어요. 이제는 의사들이 MRI 검사에 익숙해지다 보니 환자는 잊어버리고, 검사만 자꾸 쫓아가려 그래요. 내가 젊은 교수 때 응급실 레지던트가 연락을 했어요. “선생님, 마비가 왔는데, MRI에 아무것도 안 나오는 데요?” 가서 봤더니, 척수병증이야. 그러니 뇌 MRI만 찍으면 뭐가 나와? 안 나오지. 요즘은 진찰용 가방 들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전에는 다 들고 다녔잖아요. 난 아직도 들고 다니거든. 우리 어머니가 미국 가셨을 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사가지고 오셨어. 그래서 아직도 그걸 잘 쓰고 있어요^^.


Q: 요즘 전공의들한테는 정말 중요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A: 두 번째는, 뇌라는 것은 모르는 것이 아직 제일 많잖아요. 스스로 ‘뇌를 다루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특별한 자긍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나보다도 선배님들, 그 선배님들이 신경과의 지금 같은 위상을 만들기 위해 옛날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지, 그걸 잊으면 안 돼요. 그때, 다른 과에서 온갖 푸대접을 받아 가면서 노력하셨는데, 요즘은 그런 걸 모르는 것 같아요. 이런 말 자꾸 하면 또 꼰대라 그러겠지. (웃음)


Q: 저도 그 ‘꼰대’가 되어가는지 선생님 말씀하신 것이 아주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선생님,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정년하시면서 오랜 세월 내조해 주신 사모님께 무슨 선물을 하셨나요? (웃음) 이제 접어드는 인생 3막, 사모님과의 계획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A: 정년 하기 7, 8년 전부터는 여행을 자주 같이 다녔어요. 남미도 가고, 미국, 유럽 등에요. 제가 단기 연수를 두 번 갔는데, 한 번은 북유럽, 마지막 단기 연수는 남프랑스로 갔었는데 모두 아내와 함께 갔었어요. 그 정도 해주면 되지 않을까? (웃음^^)


Q: 앞으로 병원장이나 신경과 의사로서가 아니고, 가정적으로 사모님과 어떤 인생을 보내고 싶으세요?


A: 글쎄요, 우리 집사람이 나한테 많이 맞춰주는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둘이서 같이 단기연수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어떤 분이, 연수를 가면 분명히 부부싸움할 거라고, 다 그런다고 했지만, 한 번 그랬나? 그냥 잘 맞춰줘요. 글쎄… 어떻게 보면 나는 복받은 사람이지. 제 아내는 아직도 도시락을 싸줍니다. 아직까지는 싫다는 소리 한 번 안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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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시면 해 주시죠.


A: 젊을 때는 자기 일에 몰입하고, 공부를 해야 될 때가 있어요. 그걸 놓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게 되면,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분야 말고,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고급 기술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어요. 후학들에게 꼭 당부합니다.


선생님, 귀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후배 신경과 의사들의 귀감이 되어 주시길 바라며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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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산병원 김종성 교수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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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교수님의 정년을 축하드립니다. 대한신경과학회 36대 회장까지 역임하시고 서울아산병원을 이끌어 오셨는데 신경과 학회 일원으로서 수고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정년을 맞이하신 것에 대한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A: 제가 정년을 맞아 은퇴를 한다는 자체가 실감 나지 않습니다. 아직 할 일이 많고 계획도 창창한데요.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 은퇴 - 이런 것들은 본인이 깨닫지는 못하고 남이 알려줘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질문을 받았으니 잠시 저의 기억을 되돌려보려 합니다.

1989년, 처음 교수로서 일한 곳은 풍납동의 허허벌판에 선 서울아산병원 (현재 서관, 당시 이름은 서울중앙병원)이었습니다. 당시 저 외의 스태프는 황연미 교수뿐이었습니다. 전공의도 없었고, 외래 간호사는 1 명 있었지요. 입원 환자들이 있으니 병원에 늦게까지 남아 있어야 했고 당직은 하루 건너가며 했었습니다. 다음 해에는 전공의가 한 명 들어와서 (강중구 선생) 일이 한결 편해졌지요. 그래도 당시 입원 환자 수가 거의 30 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후 김광국, 이상암, 이재홍, 임주혁 교수들이 들어오고 미국 미네소타에 계시던 이명종 선생님도 과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이명종 선생님의 탁월한 실력과 인품으로 아산병원 신경과는 나날이 발전했습니다. 저는 여러 과의 뇌졸중 관련 교수들이 참여하는 `뇌졸중 센터’를 2007 년 개소하였고 2019 년까지 센터장을 맡았습니다. 이 센터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인 뇌졸중 센터로 자리 잡았고 수많은 연구논문들을 발표했습니다.

학회 일로는 저는 주로 학술지 발간 일을 한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2005년부터 대한 신경과학회지 편집위원장을 맡으며 이를 영문잡지 Journal of Clinical Neurology (JCN)로 바꾸는 작업을 했는데 이 학술지를 SCI 등재시키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당시 신경과 학회원들이 SCI 논문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JCN 이 SCI 잡지가 아니므로 여기에 투고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면서 심사위원들의 기대치는 높아 투고되는 논문들이 수준이 안 된다고 모두 탈락시킵니다. 결국은 나와 몇몇 편집인들이 있는 힘을 다해 논문이나 종설을 써서 채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투고되는 논문들을 수준이 되도록 애를 써 고쳐서 싣기도 했습니다. 이 작업들이 너무 힘들었기에 몇 년이 지나 허지회 교수에게 편집위원장을 넘길 때 나는 매우 걱정이 많았지요.
게다가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학회에서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한국에서 나오는 잡지인데 왜 Korean 이란 이름이 없느냐고 매번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Korean 이란 이름을 붙이면 외국 학자의 논문 투고가 줄어들 것이고 따라서 SCI 등재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꿔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톰슨 로이터에서 우리 잡지가 SCI 등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 JCN은 승승장구하여 현재 피인용지수(impact factor [IF]) 2.5 정도되는 국제 학술지로 성장했습니다.

JCN 이 성공하자 이번에는 대한뇌졸중학회지의 영문잡지화 작업도 내가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학술지 이름을 Journal of Stroke(JoS)로 한 영문잡지를 2013년 탄생시켰습니다. 당시 우리 편집팀은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단 review article 들을 여러 국내외 동료들에게 부탁하고 인용이 많이 될 만한 stroke epidemiology 같은 주제를 series로 출간했습니다. IF를 높이기 위해 case report를 없애고 Letter로 원고를 받는 등 여러 작전을 구사했습니다.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톰슨 로이터에 우리 잡지가 SCI 등재되어야만 할 이유를 적어 설득하기로 했는데, 너무나 다행히도 그 내용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2 달 후인 2014 년 10 월 SCI 잡지로 등재해 주겠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JoS의 첫 IF는 2016 년 4.795로 나왔는데 이는 우리나라 의학 잡지 중 두 번째로 높은 점수였습니다. 이후 IF는 점점 올라 2019 년 IF는 무려 7.47까지 올라 IF는 600 여 종에 달하는 국내의 모든 학술지 중 가장 높으며 국제적으로도 Stroke (IF 7.190)을 제치고 가장 높은 IF를 갖는 뇌졸중 학술지가 되었습니다.

학술지 활동 외, 저는 아시아오세아니아신경학회 (AOCN), 세계뇌졸중학회 (WSC), 세계 두개강내동맥경화학회 (ICAS) 등 여러 국제 학술대회를 유치하거나 개최하느라 여러 동료분들과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학회원들의 도움으로 이런 학회들은 모두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경계 질환 환자에게 흔한 우울증 및 유사 감정 장애 환자에게 항우울제를 2 달까지만 쓸 수 있다는 규제는 불합리하며 신경과 환자들의 outcome을 나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신경계질환 우울/행동장애 연구회를 만들어 최근까지 회장으로 일했고 홍승봉 교수와 더불어 부적절한 규제 철폐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와중에 소송을 당하는 등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그래도 결국 4 대 신경계 질환 환자에서는 우리가 항우울제를 자유롭게 처방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정년을 맞아 생각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이렇게 적어봤습니다. 앞으로 저의 후배들이 더욱 노력해서 세계적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의 신경과를 만들어 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Q: 교수님께서 많은 전문과목 중에 신경과를 선택하시게 된 계기와, 신경과 파트 중에서도 뇌졸중을 전공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요?


A: 저는 싯다르타는 아니지만 왜 그랬는지 학창 시절 때 이 세상을 negative 하게 보는 시선이 있었습니다 - 왜,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시기하고 괴로워하는지 -- 그러다 보니 불교 책도 읽었고 특히 인간의 정신을 해석한 프로이트, 융의 책을 많이 보았습니다. 따라서 의대 진학한 후 정신과를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책들을 이미 읽어서 그런지 저는 정신과 공부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별로 공부를 안 해도 항상 A 플러스를 맞았던 것 같습니다. 정신과 실습 때도 다른 학우들에 비해 active 하게 참여했던 기억입니다. 그러나 점점 환자의 증세를 매번 사이코다이나믹으로만 해석하는 것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정신병도 무슨 뇌의 문제로 생기는 것 같은데 그 때만해도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교수님들이 안 계셨습니다 (현재는 뇌의 구조 혹은 화학적 변화로 정신 질환을 해석하는 경향이 더 많지요). 그래서 `뇌’를 좀 더 확실히 공부할 수 있는 신경과로 방향을 튼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개인적 계기가 있었는데, 학생 때 청량리 정신병원에 실습 나갔던 이야기입니다. 저는 애인과의 관계가 나빠져 심한 우울증이 생긴 젊은 여성 환자를 맡았습니다. 이 환자는 하루 종일 꼼짝 않고 말도 안 하던 상태. 저는 마치 의사가 된 듯 열심히 가서 말도 걸고 조언도 하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녀의 상태는 점점 좋아져 말도 하고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실력이 있어 환자가 좋아졌는 줄 생각하고 내심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몇 주 지나 실습을 마치고 서울대로 돌아가야 하므로 그 환자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니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오늘 부모님이 오시니 보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정신과 증상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저를 새로운 남자 친구인 줄로 알고 있어 좋아졌던 것이지요. 그때부터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과연 무엇인가’ - 회의가 생기면서 정신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졌습니다.

신경과에 와서 뇌졸중 파트를 선택한 이유도 비슷합니다. 일단 뇌졸중은 뇌를 국소적으로 손상시키며 MRI를 사용하면 그 영역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국소적 병변이 생기면 갑자기 말을 못 하거나 못 알아듣거나 혹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므로 인간의 행동을 뇌의 현상으로 해석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전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만해도 tPA, 혈전 제거술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사실상 뇌졸중은 별로 치료할 것이 없던 시절입니다. 그러니까 순전히 뇌에 관한 호기심 때문에 뇌졸중 분야를 택했던 것이지요.


Q: 세 가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기억에 남는 환자, 기억에 남는 제자, 교직 생활 중 기억 남았던 일 등에 대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기억에 남는 환자:

뇌졸중 환자는 나이가 많고 흔히 후유증이 남아 대개 울적합니다. 제가 치료했는데 후유증이 많이 남은 환자를 보면 저도 미안하고 함께 울적해지지요. 그런데 후유증이 많은데도 명랑한 표정과 유머를 말하고 저한테 오히려 감사하는 환자들은 제 기억에 남게 됩니다.

이름은 잊었지만 지방에서 꽤 큰 농장의 주인을 하던 남자분이 뇌간 뇌졸중으로 거의 `잠금 증후군’ 상태로 후유증이 남은 적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시야 장애가 생겨 시야의 1/4 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퇴원할 때 사실 저 자신도 환자가 별로 많이 나아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지나 외래에 올 때 남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는 걸어 들어왔습니다. 시야는 여전히 1/4 밖에 안 보이고, 발음도 불분명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고 껄껄 웃으며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선물도 가져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선물이 아니라 그가 불굴의 노력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후유증이 아직 많은 데도 명랑하다는 사실에 고마웠습니다. 사지가 멀쩡한데도 오히려 그 환자보다도 불만이 많고 울적하게 사는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기억에 남는 제자:

우선 우수한 제자들이 기억납니다. 저는 목요일마다 펠로우 선생들과 연구 미팅을 갖습니다. 물론 커다란 아이디어는 제가 내지만 이를 가지고 토론하면서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연구란 항상 `새로운’것을 찾아야 하는 것인데 저처럼 크게 보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데이터를 직접 모으는 사람이 오히려 뭔가 새로운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법입니다. 우수한 펠로우들은 그 순간 이를 깨닫게 되며 나한테 `아 그럼 이것은 이렇게 조사해 보면 어떨까요” 하고 suggest 하게 됩니다. 이런 펠로우들을 나는 존경합니다. 반면 인간성이 좋은 제자들도 존경스럽습니다. 보통 전공의/전임의 때는 일이 힘들어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남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희생하는 제자들이 있어 존경스럽습니다. 또한 전공의/전임의가 제가 보기에는 어른인데 immature 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언제까지나 학생인 줄 압니다. 예컨대 해외에 나가 식사를 할 때도 당연히 교수가 내야하는 걸로 알지요. 그런데 선진국에서는 물가가 비싸기 때문에 여러 제자들 식사값을 교수가 내기가 어렵거든요. 이럴 때 교수의 입장을 헤아리고 오히려 교수를 도와드리려 애쓰는 mature 한 제자들을 저는 좋아합니다.

교직생활 중 기억 남았던 일:

아무래도 큰 상을 받을 때가 기억에 남지요.
저는 운이 좋아 상을 여럿 받았지만 함춘의학상, 분쉬의학상, 아산의학상 - 이 세 가지 상을 받던 당시 일들은 아직도 기억합니다. 우선 교직 생활 중 제가 피땀 흘리며 연구한 결과를 인정해 주니 감사한 기억이 남지요. 또한 이런 큰 상을 받을 때는 그 장소에 감사해야 할 많은 선후배들, 게다가 스승님들도 와 주시기 때문에 더욱 뜻깊고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 학교에 관해 말하자면, 울산대 의대 교수 분들 중 뛰어난 분들이 참 많습니다. 따라서 울산대학교수상을 받기도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울산대 연구교수상을 두 번이나 받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데, 특히 2017년 수상은 은퇴하기 얼마 전 받은 것이라 더욱 감회가 새롭습니다. 나이 들어 상을 받으면 상을 주는 분보다도 나이가 많아져 좀 어색할 때가 있는데, 다행히 그때는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울산대 총장님이 상을 수여해 주셨습니다.


Q: 교수님께서 요즘 관심 있는 분야는 어떤 것인지요?


A: 그동안 혈전용해제 tPA를 돕는 물질의 임상적 효용에 대한 연구를 해왔고 현재 2 상 연구를 마치고 그 결과를 분석 중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으나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3 상을 설계하고 진행하려 합니다. 또한 외국인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는 고지혈증약의 적절한 용량 관련 연구를 수년 더 진행해야 합니다.
그 외 지난해 발간하려 했던 수필집을 아직 발간하지 못해 올해는 완성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원래 골프를 잘 못하는데 요즘 좀 연습을 해보니 좀 느는 것 같아 여기에도 관심이 생겼습니다.




Q: 교수님께서는 『춤추는 뇌』, 『신경과 의사 김종성 영화를 보다』, 『뇌과학 여행자』 등 많은 저서를 집필하셨습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지요.


A: 물론이지요. 질문을 받았으니 의대 교수인 제가 수필집들을 쓰게 된 배경과 몇몇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는 대학, 전공의, 펠로우 시절 간혹 수필을 써 본 적도 있고, 시를 잠시 배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수를 하면서 약 10 년 동안은 논문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논문은 논리에서 벗어난 단 한 줄의 글도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순간 나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논리적인 학문 이야기는 많이 썼지만 정작 인간에 대한 글을 쓰질 않으니 뭔가 허전해진 것이지요. 그래서 바쁜 중에도 가끔은 수필을 써 보았습니다.

제가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다리를 다쳐 환자로 입원했던 역사학을 전공한 친구가 있었는데 저랑은 말이 잘 통했고 제대한 이후에도 간혹 만났습니다. 한 번은 내가 쓴 수필을 그 친구가 보고 싶다 해서 보낸 적이 있는데 그는 이것을 그의 또 다른 친구인 출판사 사장한테 보내주었습니다. 출판사 사장은 나한테 연락하여 `수필들을 책으로 엮어 내고 싶다. 그러나 신변잡기 수필보다는 뇌의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더 흥미로우므로 이것들만 출간하겠다. 다만 현재 분량이 책 한 권 내기에는 부족하니 빨리 더 써서 원고를 보내 주시라’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매우 바쁜 주니어 교수였으므로 사실 수필을 쓸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의약분업 파동이 일어나 병원이 파업하였고 몇 달 동안 응급실만 열어두고 외래를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한숨만 쉬고 있었던 그 시절, 나는 오피스에 틀어박혀 열심히 글을 쓸 수 있었고 나의 첫 번째 수필집 `뇌에 관해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그렇게 탄생되었습니다 (2000년). 영광스럽게도 이 책 1 장에 실린 `잠은 왜자나’ 편은 중학교 2 학년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의사로서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책이 출간된 후 여러 곳에서 원고 청탁이 오기 시작했는데 특히 동아일보에서 의뢰가 와서 일주에 한번 `뇌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약 1 년 남짓 글을 연재했습니다. 그러던 중 민음사에서 5천만원 상금이 걸린 논픽션을 공모한다는 광고를 신문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이런데 당선되면 영광스러울 것 같아 나는 그동안 쓴 원고들을 모아 공모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2 등을 하는 바람에 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이언스 북스에서 출간은 하고 싶다는 제의가 와서 `춤추는 뇌’가 탄생하였습니다. `춤추는 뇌’ 내가 매우 신경 써서 뇌과학을 전반적으로 기술했으며 동시에 영화, 시, 소설 등 문학적인 양념들을 많이 넣은 책으로 개인적으로는 나의 `대표작’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책은 영광스럽게도 제 2 회 의사문학상 (수필 부문) 수상의 영예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당시 심사위원은 박완서, 성석제 작가였습니다.

이어 어떤 영화 잡지에서 영화와 뇌를 엮은 원고를 의뢰받아 여러 차례 게재한 적이 있었고 이들 원고와 새롭게 쓴 글들을 정리하여 `신경과 의사 김종성, 영화를 보다’라는 제목으로 동녘출판사에서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외국 학회를 다닐 때 여행지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흔적, 특히 그들의 뇌질환을 엮은, 즉 뇌과학과 여행을 버무리한 `뇌과학 여행자’ 란 제목의 책을 사이언스 북스에서 다시 출간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고 책을 펴내보니 내 글을 사랑하는 일정한 독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라딘, 예스24 같은 북 사이트에 내 책에 대한 많은 평이 올라와 있고, 비판적인 글도 없지는 않지만 이보다는 내 글을 환영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간혹 인턴, 전공의들을 만나보면 `선생님 책을 읽고 뇌에 흥미가 생겨 의사의 길을 택했어요, `선생님 책을 읽고 신경과에 관심이 생겨 지원했어요’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책을 펴 낸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에 대한 영향력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는 역시 뇌의학과 예술을 함께 묶고 이를 진화론으로 해석한 또 하나의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책도 이 땅의 청년들이 읽고 뇌에 흥미를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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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교수님의 정년 후의 삶은 현재 남은 교수들뿐만 아니라 다른 신경과 의사들도 궁금해합니다. 향후 계획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A: 현재 울산대학에서는 정년 했으나 아산병원에서 `자문교수’의 직함으로 몇 년 동안 더 일할 것입니다. 제가 하는 진료, 연구 활동은 예전과 별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오랫동안 `연구’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책도 쓸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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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특히 신경과 의사의 길로 들어선 전공의들에게 멋진 신경과 의사가 되지 위한 당부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A: 신경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신경과에 들어왔을 것이니 그 관심을 잃지 말고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신경과는 공부는 어렵지만 하면 할수록 더 재미있어집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재미있어’ 일을 하는 사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재미있는 공부를 더 재미있게 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더불어 신경과 외 다른 분야에 좀 더 관심을 넓게 가지고 책도 많이 읽고 예술적 소견도 넓힌다면 더욱 훌륭한 신경과 의사가 될 것이며 보다 더 풍요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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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 유튜버:브레인튜브

글_손유리(서울부민병원 신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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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유리 선생님,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유튜브 채널 <브레인 튜브> 를 운영하고 있는 손유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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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튜브 채널, ‘브레인 튜브’를 운영하게 되신 계기가 무엇인지요?


첫 시작의 계기는 좀 슬픕니다 ㅎㅎ
2019년에 이직을 하게 되었는데요, 원래는 신경과가 없고 신경외과만 3분 계시는 오래된 병원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신경과를 개설하면, 병원에서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접수시켜 주거나, 타과에서도 신경과 진료가 필요한 사람들은 보내주셨는데, 누가 봐도 신경과 봐야 할 두통, 어지럼증, 치매, 파킨슨 환자들인데 신경외과로 접수시키고, 신경과가 뭐 하는 곳인지 병원에서 일하는 직원들조차도 잘 모르시는거예요. 그러니 환자들도 신경과로 오시지 않았고요. 의료가 8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두어 달 간 신경과의 환자 수가 한 자릿수였는데, 주변에서는 편해서 좋겠다, 쉬면서 다녀라 많이 얘기하셨는데, 남의 병원에서의 월급쟁이 생활이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신경과의 현실을 깨닫고, 가만히 있느니,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되었죠. 그래서 나온 첫 영상이 2019년 9월경입니다. 지금 보면 참 허접한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핸드폰, 핀 마이크 두 개로 무작정 촬영 시작해서 업로드했습니다.


3. 요즘 많은 이들의 꿈이 유튜버인 만큼 구독자를 늘리는 등, 유튜브 채널 운영 및 관리가 쉽지만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광고까지 받으시고, 1.72만 명이 구독하고 있는 손유리 선생님의 채널 인기 비결은 무엇인지요?


지금도 인기 채널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끄러운 수준이죠 ㅎㅎ 하지만, 구독자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누군가 봐주시는 것에 만족합니다. 아무래도 초반에 아무런 기대 없이 촬영했던 영상이 58만 뷰 이상을 찍으면서 그때 구독자의 유입이 많았던 것 같고요.
구독자 수를 늘리려면 꾸준히 자주 업로드해야 하는데, 아직 영상이 30개 조금 넘는 정도라서 이제 시작한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4. 신경과 유튜브 채널을 진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유튜브 하시는 분들이 악플이나, 싫어요 누를까 봐 걱정을 많이 하시고, 상처받으시는데, 저는 그런 부분에서는 좀 반응을 안 하는 편이고요. 얼마 전에는 악플에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냐 기운 내시라 정성스레 댓글을 달아주니, 굉장히 미안해하며 사과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또 한 가지는 유튜브를 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연락들이 옵니다. 영양제 도매상부터 시작해서, 이거 광고해달라, 한 번만 언급해달라. 여기저기 강의 제안도 오고 하는데, 어떤 분이 유튜버는 거절도 잘 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많은 거절을 잘 하고 있습니다. ^^


5. 신경과 유튜브 채널을 진행하시면서 힘드신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체적으로 힘듭니다. 제가 오너가 아닌데, 유튜브를 보고 오는 환자들이 너무 많아져서, 진료 시에 힘들고요, ㅎㅎ 평상시에는 개인 시간이 적고, 유튜브의 촬영뿐만이 아니라, 여기서 파생된 각종 촬영, 대본, 편집 등에 참여하고 있어서, 진료 이외의 일도 많아지고, 가족들의 불만도 함께 쌓여가네요. 늘 시간 배분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6. ‘브레인 튜브’에는 재밌어 보이는 영상 썸네일이 많은데, 본인의 채널에서 본인이 평가할 때도 너무 만족스러워서 박수가 나오는 영상의 제목은 무엇인지요? 내용도 소개해 주세요.


최근에 연예계에서 이슈가 되었던 졸피뎀에 대해서 찍었는데, 시의성을 고려해서 일찍 촬영했는데도 불구하고, 편집이 느려서 한 박자 늦게 올라갔습니다. 그래도, 저 개인적으로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영상입니다. 의료인 중에도 졸피뎀을 오남용하는 분들이 많아서 평소에도 한번 얘기해보고 싶었던 주제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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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경과학회 회원들에게 “브레인 튜브” 채널 홍보와 전하고 싶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올바른 의학지식과 뇌과학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채널 브레인 튜브입니다. ^^ 신경과의 위상이 올라가야, 좋은 후배들도 들어오고, 저희 전문의들도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선생님들 모시고 싶어서 (신경과 의사가 만난 의사: 신난의)라는 코너를 만들었고, 몇몇 선생님들 나오셔서 즐겁게 촬영해 주셨습니다. 다른 신경과 선생님들도 많이 나와주셔서 지식과 끼를 뽐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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